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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이 된 자유인 (2018.02.04)
설교자     김창운담임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고린도전서 9장 16-23절
 
 
본문 내용
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17.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Content


고전 9_16-23 종이 된 자유인
여러분, 교회란 무엇일까요? 16세기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교회를, “성도들의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중세시대에 교회가 가졌던 권위와 지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의 생명력을 말합니다. 아이를 잉태하고 낳고 먹이고 자라게 하고 양육하는 그런 생명력을 말합니다. 이 생명력의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교회는 복음으로 성도를 잉태하고 복음으로 젖을 먹이며 복음으로 양육하며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도록 이끌어주는 어머니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복음의 생명력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유와 권리에 대해 말합니다. 이 배경에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고린도의 철학적 가치관과 문화가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사람이란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고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 있는 자율적 권한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복음을 이해할 때도 자신이 지닌 자유와 권리를 가지고 복음이 주는 자유를 이해하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복음을 잘못 이해하였습니다. 그것이 분쟁이 되어, 갈등이 되고 신앙 성장에 어려움이 되었습니다. 이러므로 사도 바울은 염려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자신의 인생을 고백하면서 그 모습이 복음을 누리는 자의 모습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종이 된 자유인의 행복을 노래하듯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게 종이 된 자유란 무엇입니까?
1. 종이 된 자유란 권리를 쓰지 아니한 자유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자유가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자유를 가졌듯이 사도 바울도 자유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입니다. 당대에 가장 품위 있는 신분입니다. 고린도 교회를 세우고 이끌었던 목자요 스승이기도 합니다. 고린도교인들에게 지시하고 요구할 자격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신의 자유를 어디에 쓰느냐 하면 권리를 쓰지 않는 쪽을 선택합니다. 종의 길을 택한 자유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는 복음이 주는 자유를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5:1에서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께 붙잡혔습니다. 예수께 포로가 된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예수님께 붙잡히자,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영적 체험입니다. 우주와 역사에 가득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진리에 대해 사통팔달이 되고만 것입니다. 그러자 다른 것은 보이지 않게 됩니다. 오로지 의지할 분은 주님 한 분, 나머지 모든 것에 대해 자유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무엇이라고 할까요? 구원입니다. 구원의 은총은 입으로 잠시 고백한 입술의 표현이 아닙니다. 머리에서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가슴으로 느끼고 영혼으로 깨닫고 의지와 행동에까지 이르는 능력인 것입니다. 그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자의 고백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결코 이 진리에서 벗어날 수도 없고, 벗어나기 조차도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16절 말씀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해야만 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고전 9:16,새번역). 후반부에 나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 해서, 화가 미칠까 두려워서 어쩔 수 없이 복음을 전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이 부름 받게 된 과정을 이해해야 합니다. 열 두 사도들은 주님이 부르심을 받아서 자발적으로 주님을 따랐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마태 안드레 다들 부르심을 받고 주님의 소명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떠했습니까? 이 분은 본래 믿는 자들을 박해함으로써 주님까지도 핍박한 인물입니다. 그야말로 주님의 일에 역행한 완악과 불신앙의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즉각적인 심판을 받았다면 당장 죽음의 지옥에 빠지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를 잡으셨습니다. 강압적으로 붙잡아 사도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 자신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역사였습니다. . 그래서 17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고전 9:17)
오로지 주님의 복음에 붙잡혀 그 안에서 변화되고 사도직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에서 멀어진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 그런고로 복음을 전하는 일은 내게 자랑거리가 아니다. 상 받을 꺼리도 못 된다. 그냥 삶일 뿐이다. 그 복음이라는 삶의 핵을 버린다면 내게 무슨 생의 맛이 있겠는가, 그것은 내가 화를 당하는 일이로다! 하는 고백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상에 대해 말합니다.

2. 종이 된 자유란 상(賞)이 되는 자유입니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고전 9:18)
세상에 복지 혜택이 많아졌습니다. 모두가 권리를 주장하고 그것 타먹지 못하면 바보요 손해로 보는 세상이 된 것 같습니다.  미국 한인 이민교회에 가끔 듣게 되는 소식입니다. 버젓이 생활 잘 하는 분이 나라에서 웰페어를 받아 먹습니다. 집도 자가용도 반듯한데 웰페어를 타는 건 재산이 없어서 미국 정부의 도움을 받아 산다는 것입니다. 재산들을 모두 자식들 이름으로 돌려놓고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하죠. “공돈 못 얻어 먹는 게 바보다.” 가슴 아픈 일입니다. 풍요로운 나라의 풍성함을 자신의 권리라 여겨 누리면서도, 미국에서 가장 기본으로 생각하는 ‘정직이라는 사회적 의무’는 외면한 무지의 현실이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도 부강해지면서 어딘가에 있을 누군가의 혜택을 나도 받으려고 애를 씁니다. 권리 주장을 해서 차지하고 얻어 채우고, 목소리를 높여서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 세태의 한 모습인 것을 봅니다. 물론 그렇게 해야 하는 자리에 종사하는 분이 있습니다. 군인이든, 정치인이든, 운동 선수든, 열심히 싸워야 하는 분들이 있죠. 이제 올림픽도 열리는데 경기할 때는 이기기 위해서 열심히 뛰어야 합니다. 다만 우리 심령의 정서가 늘 공격적이고 이해타산적으로 변해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사람이란 모름지기 사랑하고 나누어주고 섬기고 감사할 때 진정으로 행복하지, 다른 사람 것을 빼앗고 헐뜯으며 내 것만 욕심을 낼 때 도리어 점점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자유와 권리를 목소리 내는 습성이 쌓이면서 민족의 의식이 퇴보될 수 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이 땅에 부어주신 복음의 능력이 함께 사라져 가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교회의 모습까지 들어온다면 대단히 위험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그러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유를 가지고 종이 되기를 선택하는데,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이 지닌 자유를 가지고, 판단하고 지적하다 분열되는 일을 택합니다. 그러자 결국은 신앙도 자라지 않고 다툼만 더해갑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자유가 있습니다. 국민으로서의 주권과 자유는 세상에서 마음껏 누리십시오. 그것도 정직선상에서 말입니다. 정직을 잃어버리면 나라를 잃습니다. 역사에서 부패가 나라를 망하게 한 일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교회에서는 내 권리와 자유를 어디를 향해 선택해야 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종의 자리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게 상이라고 고백합니다.
마태복음 20:27에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삼하 22:28의 기록처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높이시고 교만한 자를 낮추시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늘의 이치를 깨달아 말하는 것이죠, 이렇게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낮추는 것이 내게 상급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자유가 있습니다. 그 자유를 가지고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그 자유를 우리가 교회에서 어떤 종의 모습을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마다 생각할 것이 사도 바울의 또 하나의 말씀입니다. 고전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겸손히 복음을 붙들고 종의 길을 선택하는 것, 그 상을 바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3. 종이 된 자유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하는 소망입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9)
빌 3:12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되었다고 했고 그것을 잡으려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잡혀 종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너무도 기쁘고 영광스럽기에 예수님 외에는 누구에게도 자유 합니다. 어느 민족, 어느 국가, 사상, 도덕, 관습, 심지어 로마 황제의 권력에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종이 되고자 하는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을 함께 천국의 자리에 이르게 하고자 하는 소망인 것입니다.
유대인/ 율법 아래 있는 자/ 율법 없는 자/ 약한 자/ 여러 사람, 여러 모습
그들에게 ‘그들의 모습을 가지고 다가간다’는 뜻이란 것을 알 것입니다. 종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이유는 오로지 하나, 내가 만난 주님, 주님의 그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고픈 것 뿐입니다. 영혼들을 향한 열망. 이것이 종의 길을 선택한 자유인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북한에는 50만의 기독교인들이 자유가 없는 곳에서 목숨을 걸고 믿음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 땅에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의 자유는 어디를 향해 가야 할까요? 우리 모두는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북한에는 7만명의 성도가 강제수용소에서 권리라곤 없이 종처럼 중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처럼 이 땅에서 예배하는 성도된 이들의 권리는 어디를 향하고 있어야 할까요?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에게 배워 깨닫습니다. 자유가 있어, 그것을 남용함이 아니라, 그 자유를 복음을 위해 종의 길을 선택한 자에게 상급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 위에, 우리 교회에 응하시기를 선포하며 축원합니다.
[은혜를 구하는 기도]
사랑하는 하나님, 오늘도 은혜로 함께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국민으로 자유와 권리를 주셨으니 감사드리며, 구하옵기는 제게 주신 자유를 복음을 위해 사용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종의 형체를 가지고 이 땅으로 오신 주님을 본받게 하시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자랑이 아니라 삶이었던 사도의 믿음을 배우게 하옵소서.
사랑의 주님, 오늘 성경이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주님께 붙잡혔던 사도의 심령을 봅니다. 복음을 향한 그 분의 갈망이 주님으로부터 왔사오니, 주여 우리도 주님께 붙잡힌 바 되게 하시고, 내게 주어진 자유와 권리를 종의 자리로 선택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이러한 종들이 교회에 도처에 넘치게 하시고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서로가 종 되어 서로를 먹여주고 일으켜주며, 세워주며, 하늘나라 모형이 이루어지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이웃 사랑, 나아가는 선교 김창운 담임목사 2018.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