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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속사의 계보에 오른 사람들 (2017.12.10)
설교자     김창운 담임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마태복음 1장 2-5절
 
 
본문 내용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Content

마 1:1-5 그리스도의 계보에 오른 사람들
프랑스의 유명한 정신분석학자가 있습니다. 세르주 티스롱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쓴 책중에 <가족의 비밀>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의미 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족의 비밀이 한 사람의 정신세계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가. 이 책에서 한 소녀의 이야기를 합니다. 앙리 퀴에코라고 하는 여자아이입니다. 이아이가 태어날 때 입술이 세로로 갈라진 구순열이라고 하죠. 쉬운말로 그냥 언청이라고도 하는데, 구순열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천진난만 하니까 어릴 때 본인은 그 사실을 의식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다섯 살 된 해에 어느 날 집안에 주치의가 왔다가 그간 가족들 모두가 쉬쉬하던 그 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이 언청이를 산토끼 주둥이렇게 말합니다. 그게 토끼모양으로 입이 생겼다고 해서. 그런데 이 의사가 그만 "우리 산토끼"라고 불러 버리고 말았습니다. 퀴에코가 할머니에게 물어봤습니다. "산토끼가 뭐예요?" 그러자 할머니가 허둥지둥 말을 얼버무리고 외면해버렸습니다. 그 후로 이 아이는 그 질문을 다시 하지 못합니다. 어떤 답변을 듣게 될지 너무 겁이 났기 때문입니다. 그런 불안감은 점점 수치심으로 바뀌고 죄의식으로 바뀝니다. 자신의 식구들에게 그 명예를 먹칠하는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식구들이 나를 창피해 하는 것 같습니다. 나중에는 나는 벌을 받아 마땅한 존재라고까지 생각하게 됩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을 고립시키고 <나는 이렇게 살아야 되는 것이 마땅하다, 나는 이렇게 살아야 되는 것이 당연하다>하는 핑계를 가지고 점점 인생을 비극적으로 생각하고 바라보게 됩니다. 집착적으로 토끼에 대해서 정보를 섭렵합니다. 평생에 모든 호기심이 '주둥이', 이게 뭔가 주둥이에 집착하게 되면서 살아갑니다. 어른들이 풀어주지 않은 비밀이기 떄문에 그렇습니다. 성인이 된 퀴에코는 나중에 쉰 살이 되어서야 이 언청이는 이 구순열은 간단한 외과수술로 고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제서야 자신을 돌아보면서 그간에 이 상처에 묶인 채로 매인 채로 어리석게 살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이 삐뚤어진 사람의 경우 대부분 추적을 해보면 가정에서부터 그 실마리가 풀립니다. 어느 집이던 가족들만의 이야기가 있게 마련이죠. 그 중에 비밀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비밀들은 아이가 자라면서 갖게 되는 정체성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 비밀이 아이의 마음을 옭죄고 그러면서 이게 해악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비밀들은 주로 출생의 비밀이 있습니다. 차별 대우도 있습니다. 죽음에 관한 것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사생아의 비밀, 혹은 혼외 자녀의 비밀, 자녀는 모르는 재혼에서 출생한 일, 양자로 데려온 경우, 이혼이나 혹은 육체의 질환이나 정신적 질환 같은 것,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부모님들은 보통 “아이가 어리니까… 충격을 받을까 봐.” 생각해서 숨겨주는 것이라 하지만 이 티스롱 박사는 그렇게 숨기는 것이 훨씬 더 해로운 결과를 가져온다고 합니다. 훗날에 비밀이 밝혀졌을 때 이미 둘로 쪼개져 있는 이 아이의 정신세계 그것은 상처로 너무 많이 벌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숨어 있는 상처와 정면으로 마주하라!> 상처를 꽁꽁 숨기고 묶어 놓고 있을 때, 그것은 결코 치유가 되지가 않습니다. 해결되지가 않습니다. 치유되지 못하면 사람은 성장하지를 못합니다. 어찌해야 하는지 그 비결이 있습니다. “숨겨진 상처와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데, 그 때 말씀 안에서, 말씀으로 그것을 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 서두인 마태복음은 1장에서 바로 이 숨기고 싶은 사연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승자의 역사는 승리라는 결말을 향해서 모든 이야기들을 거기에 짜 맞추죠. 어느 가문이던 족보를 쓸 때 좋은 이야기, 좋은 인물들만으로 명맥을 이으려고 하죠. 그래서 사람들이 자식들에게 제일 큰 욕이 뭡니까? 호적을 파버린다 하잖아요. 그런데 이 마태복음 계보에는 감추고 싶은 이스라엘의 역사, 살인과 강간과 거짓말과 배반의 역사, 이 조상들이 당사자 입장에서라면 당연히 감추고 싶은 일을 여실하게 드러냅니다. 마태가 심술이 난 것일까요? 아니면 무슨 진실규명이라도 하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는 이 계보 속에 담긴 하나님의 구속사건을 본 것입니다. 마태는 본래 세리였습니다. 세리였던 마태는 예수님을 만나고 그 자신의 문제들이 치유되고 해결되었습니다. 세리로 가졌던, 세리로서 받아야 했던 모멸감, 상처, 죄책감 이런 것이 컸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주님과 동행하면서 주님의 사랑을 받고, 그리고 주님께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이 모든 역사의 현장을 바라보면서 구속의 역사가 이루어진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 죄인들의 혈맥 속에서 여기에 기록된 사람들이 윤리적으로나 종족적으로나 혈통적으로 수없는 허점을 지니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이 사람들을 통하여 2천년 동안이나 구속사의 경륜을 이어온 것을 그는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은 유대인들이 읽도록 하기 위한 책입니다. 유대인들은 혈통과 출신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긴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아브라함 다윗 이 두 사람을 필두에 내세웁니다. 이들을 자랑스럽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이것을 적는데, 전도할 때, 늘 그렇게 하죠. 만나는 분들의 관심사에 맞추어서 만나지 않습니까? 마태의 기법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 아브라함, 다윗. 이 계보를 적어놓고 다음 한 대, 한 대, 구속사에 속한 이름들을 올리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 와 열한 형제를 낳고…. 이 한 절에 기록된 족보는 유대인들이 족보를 쓰는 방식과 다릅니다. 우리 민족도 그랬듯이, 모세 율법은 장자가 계보를 이어 받도록 했습니다. 출 22:29에 보면, “너는 네가 추수한 것과 네가 짜낸 즙을 바치기를 더디 하지 말지며 네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줄지며” 이렇게 했습니다. 첫 아들은 하나님의 것이요, 귀한 아들, 그에게 계보를 물려가도록 한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입니까. 이삭은 아브라함의 둘째 아들입니다. 야곱도 이삭의 둘째 아들입니다. 유다도 장자가 아닙니다. 그는 넷째 아들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건강하고 튼튼했던 이스마엘, 그보다 연약한 이삭이 계보에 올라와 있습니다. 이삭의 후세로 사냥 잘하고 힘세고 부모에게 효도 잘하는 에서가 올린 것이 아니라 야곱이 올라왔습니다. 야곱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돈 좋아하고 여자 좋아하고 자기 좋아하는 것은 반드시 해내는 인물입니다. 유다는 정말 19금에 해당되는 폐륜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구속사의 계보에 올라있습니다.
이 짧은 족보의 언급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이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야곱의 열 두 아들 중에 요셉은 그야말로 실질적인 장자와 같습니다. 야곱과 온 형제들의 생명을 살린 인물입니다. 수많은 생명을 살린 인물이죠. 신학적으로는 이 사람이 생명을 구하는 자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도 말합니다. 창세기에는 무려 37장에서 48장까지가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형통하게 하신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구속사의 이름 중 요셉의 이름이 빠져있습니다. 대신에 유다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에 메시지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바램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이스마엘처럼 건강하고 싶습니다. 에서처럼 강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사라처럼 예쁘고 싶고, 리브가처럼 사랑받고 싶습니다. 요셉처럼 성공한 인물이 되고 싶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감추고 싶은 비밀을 갖고 있는 이름들을 구속사의 족보에 올려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나의 공로나 나의 행위로 가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자가 가는 곳이라는 사실을 들려줍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는 자입니다. 자신의 죄됨을 고백하는 정직한 심령으로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그러므로 주님을 영접한 자가 가는 곳, 그곳이 하나님 나라라는 것입니다. 생각을 해보십쇼. 여러분 우리 아이 중에 한 명이 하버드 대학에, 미국 하버드 대학에 전액장학금으로 입학했고, 수석으로 졸업을 했고, 그리고 미국에 국무총리가 되었다고 합시다. 게다가 효성이 지극합니다. 가족들도 열심히 돌보아서 자기 돈으로 우리 그 가족들 일가를 위해서 아파트 한두 채가 아니라 두세 동을 그냥 막 사가지고 응? 다 이렇게 공급을 했어요. 모든 형제들 아버지 다 살라고. 얼마나 대단합니까? 교회 건물도 턱하니 지어주고요, 그 힘든 믿음의 형제들 척척 잘 도와줍니다. 그야말로 성공했고, 그야말로 성격 좋고, 인물 좋고 빼놓을 데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 녀석은 하는 짓이라고는 엉뚱한 일만 저지르는 것 같고, 간음까지 하고, 그 훌륭한 동생 요셉을 괴롭히는 일까지도 했습니다. 우리 같으면 누구를 자랑하고 싶을까요? 당연하죠. 요셉입니다. 유다에게는 아마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유다야, 제발 나 보이는 데서는 나오지 마라. 교회에서는 바쁘니까 우리 서로 아는 체 하지 말자. 그래놓고 요셉을 보면은 어떻겠습니까? 목사님 얘가 바로 요셉입니다. 내 아들 요셉입니다. 얘가 국무총리 요셉입니다. 나라를 돌보느라고 바빠서 교회는 잘 못나옵니다. 그래도 얘가 믿음이 있습니다. 장로님 얘가 요셉입니다. 바로 이 친구가 요셉이란 말입니다. 내 아들입니다. 자주 교횐 못나오지만, 그래도 장로님 지난번에 건축헌금 크게 냈자나요. 자랑할겁니다. 어리숙하고 실수도 하지만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자 하는 유다보다, 버젓하게 세상에서 성공한 요셉이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대부분 우리가 그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에게 영적인 눈을 열어서 유다에게 영적 후사인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창세기 37장에서 48장에는 요셉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중간 38장에는 유다의 이야기만 따로 떨어져서 나옵니다. 여기에는 유대인의 계대혼인법이란 것을 좀 알아야 되는데, 다음 주일에 우리 보아스에 룻과 보아스의 얘기를 하면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그런데 우선 간단히 본다면, 형이 자식이 없어 죽으면, 즉 장자가 자식이 없이 죽으면 동생이 그 형수에게 씨를 주어서 기업을 이어가게 하는 법입니다. 그 법도에 따라서 유다가 장자 엘이 있었는데, 자식이 없이 죽자 그 며느리 다말에게 오난, 그 동생 오난을 줍니다. 그런데 이 오난이 자기 씨를 형수에게 주지 않으려고 땅에다 설정을 하다 하나님이 그를 치셔서 죽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오난을 이어서 셋째 셀라가 들어가야 되는데, 이 셀라를 주어야 되는데 이것을 어깁니다. 이 아들 조차 죽을까봐 법을 어기고, 며느리 다말을 친정집으로 돌려보내버립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법도 속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기업의 씨,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어가도록 한 기업의 씨를 잇지 못하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자 며느리 다말이 기생으로 꾸미고 시아버지의 씨를 받아 대를 잇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성경에 등장하는 것이 이상하고 황당스러울지 모르지만, 창세기가 이 사실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마태가 그 사실을 리마인드 하듯 기록해 놓은 이유가 있습니다. 유다가 며느리 다말이 임신하였다는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그를 불사르라 했다가 그 씨가 자기의 씨인 것을 알게 되자 크게 깨닫고 회개하듯이 외친 말이 있습니다. 창 38:26 말씀입니다. 우리 다 같이 읽어보실까요? 시작!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그는 나보다 옳도다!” 이 말입니다. 나는 내 욕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대로부터 이어가도록 하신 유업의 대를 끊으려 하였다! 그러나 며느리 다말이 이렇게 해서라도 영적인 기업을 이어 가고자 하는 이 열심을 보고 이 믿음을 보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 이 고백 속에 자신의 죄와 허물을 회개하는 회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다시금 되찾는 자의 기도의 마음이 있습니다. 사실 이 모든 일은 수치스런 일입니다. 생각해보면 두고두고 이 유다는 아마 평생도록 주변에 놀림감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고백할 바를 고백하고, 인정할 바를 인정하고,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당시 야곱은 이 유다를 지켜보면서, 하나님께서 자신 야곱에게 주셨던 기업의 축복, 그것을 이 유다를 통해 이어 가고자 하시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기업을 이어가는 유다를 야곱은 새롭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이 아들들을 축복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축복의 시간은 여러분, 세상을 운명하기 직전, 영적으로 가장 고양된 상태, 가장 정결한 상태입니다. 이때 유다의 축복을 이렇게 합니다. 창 49:8-10입니다. 다같이 한번 읽어보십니다. 함께 합시다. 시작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네 형제의 찬송이 될 것이라’는 말은 온 형제들 위에 있을 것을 말합니다. ‘네 손이 원수의 목을 잡는다’는 말씀은 창세기 3:15에 기록된 여자의 후손으로 원수 대적을 물리칠 그 메시야가 너의 씨에서 나온다는 뜻입니다. 규나 지팡이는 당연히 왕을 상징합니다. 이 축복대로 유다의 후손 다윗이 왕이 되고 왕의 가문으로 이어집니다. ‘실로가 오신다는 말’은 바로 예수님이 오심을 뜻하고, 그 분에게 모든 무릎이 꿇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장 깔뱅, 존 칼빈은 이 본문에 대해서 해석할 때, 빌립보서 2장에 나오는 자기 비하의 시작이 여기에 있다고 설명합니다. 즉, 빌립보서 2장 6-8절 말씀 우리 수요기도회 나오는 분들은 대부분 암송을 합니다. 우리 다같이 한 번 읽어보십시다. 시작.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늘 보좌에 계신분이 내려오시고, 내려오시고, 내려오셔서, 비하되시고 비참한 자리까지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다. 이 말씀의 실현이라는 것입니다. 그 실현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족보를 깨끗하게 보존하시고 그 족보의 씨에서 탄생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온갖 죄로 얼룩진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종의 형체를 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불법과 불륜을 저지른 인간들을 자신의 조상으로 삼는 것조차 거절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계보를 대면서, 대할 때 발견하지 못한 인물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이름도 없습니다. 리브가의 이름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요조숙녀들인데 안 들어있습니다. 요셉의 아들들을 낳아준 애굽의 대단한 명문가의 딸 아스낫, 이런 이름도 안 들어있습니다. 대신 다말이라는 이름이 들어있습니다. 라합이라는 여인 이름이 있습니다. 라합은 여리고 성의 기생입니다. 가나안 우상 종교에 익숙한 사람이요, 가장 성적으로 타락했던 그 가나안의 타락한 문화에 빠져있던 여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5:6에는 참으로 의미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때로부터 하나님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출생이 어떻고 혈통이 어떻고 아닙니다. 심지어 갖은 실수가 있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듣고 믿었느냐 아니냐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듣고 믿고 하나님의 기업을 이어간 자들의 이름을 올려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룻도 등장하는 것이요, 우리야의 아내도 등장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요조숙녀, 훌륭하고 성공적인 인물들의 이름을 올린 것이 아니라, 죄를 고백하고, 연약하고 허물 많은 인생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부여잡고 믿은 이들의 이름이 온 우주의 주인 되시는 주님의 족보에 찬란히 그 이름이 올라간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미국에는 그 사회를 주도하는 층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화이트 앵글로색슨 프로테스탄트라고 말합니다. 백인, 청교도 출신, 개신교 기독교인들을 말합니다. 이 사람들이 명문 대학을 많이 세우고 인재를 많이 양성하며 그 나라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제가 연구하고 공부했던 바이올라 대학에서도 약 85%이상이 앵글로색슨 프로테스탄트였습니다. 그 신실한 가문의 자녀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본래 이 화이트 앵글로색슨 프로테스탄트가 영국입장에서는 얼마나 형편없는 대우를 받았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그야말로 형편없는 상것으로 보았습니다. 나중에는 식민 지배까지 했습니다. 이들은 영국에서 건너올 때 풍랑에서 죽었고, 먹을 것이 없어 죽고, 농사짓다가 죽고, 얼어 죽고, 풍토병에 걸려 죽어갔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에 그 사람들은 오늘 날 가장 큰 나라, 세계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이 위업을 이뤄낸 기초는 단 하나입니다. 믿음 그것입니다. 성경에 손을 얹고 시작한 나라요, 지금도 어떤 일에 혼란스럽고 때때로는 세계의 흐름 속에 오버가 있는 게 사실이지만 결정적일 때는 성경에 손을 얹는 정신이 그들에게 있습니다. 그것이 그 나라를 지탱하고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창세기 5장에는 아담의 족보가 있습니다. 아담에서 노아의 대까지 기록된 이 족보는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하고 마칩니다. 그러나 오늘 마태복음, 예수님의 계보는 낳고 낳고로 이어집니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속했습니다. 마태복음의 족보는 바로 우리의 족보입니다. 갈 3:29 말씀을 다 같이 읽어 보실까요?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오늘 여러분은 예수의 계보 속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사실 세상 속에 다 흩어져 있다가 이제 계보 속에서 다시 만난 것입니다. 벧엘교회에서 우리는 제대로 된 영적 계보, 이 안에서 우리는 가족으로 만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벧엘교회를 소개할 때 무엇을 소개합니까? 사회적으로 명성을 갖추고 돈을 많이 가진 분, 혹은 어려운 처지에 있지만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보는 초신자, 둘 중에 어떤 사람들을 벧엘교회에서 우리 교인이라고 소개하고 싶으십니까? 고린도 후서 6:9-10은 이렇게 말합니다. 다 같이 읽어보십시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우리에게 자랑할 만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오로지 하나님께서 2천년 동안 한 결같이 신실하게 속이는 자, 간음한 자, 연약한 자, 멸시 받는 자, 그들을 통해 낳고 낳고 낳고의 계보를 이어오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걸 통하여 구속사를 이루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낳고 낳고 낳는 이 생명은 무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한결같은 은혜로 우리를 살리셨고, 오늘까지 삶을 이어오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예수 그리도의 계보로 이어오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계보는 바로 우리의 계보인 것입니다. 이 위대한 주님의 계보가 우리들의 삶에, 여러분의 삶에 여러분의 가정에 온전히 들어올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를 구하는 기도]
하나님, 마태복음 1장의 그리스도의 구속의 계보에 제 이름이 오르는 영광을 깨닫습니다. 온전히 주님의 은혜로 이룬 복이오니, 우리들의 마음이 주님의 마음을 깨닫게 하시고 주님의 말씀을 향해 돌아서게 하옵소서. 말씀이 육신 되어 오신 주님을 우리 집에 모시며 말씀의 깨달음들이 더해가게 하옵소서. 세상에 물질이나 자랑할 만한 것으로 나를 보지 않게 하시고, 구속사의 은총 속에서 날마다 나를 발견하며, 내게 주신 말씀을 붙들고 믿음을 지켜가고 구속의 역사를 잘 이어가는 자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오늘 저희에게 들려주신 말씀이 참으로 귀하고 감사합니다. 우리를 향해 오시는 주님을 붙잡게 하시고 주님의 계보에 속하여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저희 가정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을 붙들고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고, 내 생애 부어주시는 은혜, 계보를 잇게 하신 그 은혜를 감사함으로, 치유가 되게하시고, 해결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가정마다 이 계보에 다 들어올 수 있는 가정들, 우리 교우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 김창운 담임목사 2017.1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