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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루터기의 감사 (2017.11.12)
설교자     김창운 담임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이사야 6장 1-13절
 
 
본문 내용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4.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6.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11.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12.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Content

그루터기의 감사
지난 11월 11일 우리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의 언론이라 할 수 있는 기독공보에는 미국교회의 방문 기사가 있었습니다. 미국장로교회(PCUSA)의 허버트 넬슨 사무총장 등 열여섯 명의 기독교인이 10월 31일에 한반도를 방문했습니다. 평화순례단으로 방문한 것인데, 다름이 아니라 한국전쟁 당시에 있었던 일을 사과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6.25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에, 충북 영동군 노근리, 그 곳에 쌍굴 다리라고 있는데, 거기에 주민들이 피신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군들이 이 마을 주민들인 줄을 모르고 적군인 줄 알고 총으로 난사를 해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던 일이었습니다. 이 일을 사과하기 위해서 미국 장로교에서 온 것입니다. 이 분들이 말합니다. “미국 정부와 군을 대표할 수는 없지만 미국의 기독교 시민으로서 용서를 구하며, 미국 교회가 분단된 한반도의 치유 평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소명을 다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 지난 2017년 10월 12일에는 숭실대학교 한경직 기념관에서 <동북아 3국의 기독교 선교- 그 수용 양상과 오늘의 현황>이라는 주제의 학술대회가 있었습니다. 한국기독교문화연구원, 우리 곽신환 장로님이 현직 원장님으로 계신데, 이 문화원에서, 연구원에서 개최한 학술대회에 우리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했던 프랜시스 킨슬러 목사님의 아들 아더 킨슬러 목사님의 강연이 있었습니다. 이어서 중국, 한국, 일본을 대표하는 학자들의 주제발표가 있었습니다. 특히 여기에서 도시샤 대학교, 우리나라에선 동지사대학교로 알려져 있는, 도시샤 대학교의 하라 마코토 교수는 <동아시아에 있어 일본 기독교의 역사적 위치와 의의>라는 주제 발표에서 일본 기독교가 “전쟁책임고백”을 하였던 사실을 언급합니다. 일본 기독교가 동아시아를 비롯한 대한민국을 식민지배를 하고 있고, 또 전쟁을 일으킨 바로 그 때에 책임을 통감한다는 그 때의 일을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씁니다.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인 교회는 그 전쟁에 동조하였고 일본의 걸음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했어야 했다” 이 고백과 함께 “조국이 죄를 범했을 때 파수꾼의 사명을 소홀히 한 것을 회개하며 용서를 구한다.”는 전쟁 책임 고백문, 이것을 언급하였습니다.
세상 나라는 못하지만, 하나님 나라 사람들이 잘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용서입니다.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하며 화해를 이루고 손을 잡을 수 있는 것이 하나님 나라 사람들이 잘 하는 일입니다. 이유는 천국에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나라에 속하였지만, 본질적으로 천국에 속하였으므로 천국의 진리인 사랑, 천국의 법도인 용서와 화해 이것이 예수님을 믿고 천국의 길을 가는 사람들의 마음에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스스로 고난의 민족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고난의 역사는 사실 전 세계 역사를 들여다보면 우리 민족의 것만은 아닙니다. 지금도 바로 오늘 적지 않은 민족들이 참으로 가슴 아픈 고난의 시대를, 고난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강대국들 사이에서 영토를 잃고 방랑하는 민족들이 얼마나 많은 지 아십니까? 얼마 전에 미얀마 불교의 탄압을 받고 많은 희생자를 두었던 로힌야 족은 미얀마, 방글라데시, 사우디아라비아, 파키스탄 등에 흩어져 사는 참으로 약소한 민족입니다. 세계 뉴스에서 간간히 듣게 되는 크루드족. 이들은 이란, 이라크, 알 마니아, 레바논 등에 흩어져 삽니다. 전세계중에 선교가 가장 열악해서 많은 선교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라오스에는 특히, 고산족들이 있습니다. 산 위의 고산지대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이들. 라오스, 태국, 베트남, 미얀마 등에 흩어져 사는 수많은 방랑의 민족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나라가 없으므로 주권이 없습니다. 의료혜택이 없다는 말입니다. 국민의 권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힘들고 아플 때 쌀 한줌 주는 정부가 없다는 말이요, 어린아이가 태어나도 유치원교육, 초등학교 교육 꿈도 못 꾸는 그런 민족들이 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오늘 고난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우리의 현실을 새롭게 인식해야 됩니다. 고난의 역사가 과거에 있었지만, 이제 우리는 부강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놀라운 기적을 이루어낸 민족입니다. 세계가 경제 발전의 기적들을 말할 때는 독일의 라인강의 기적, 혹은 일본 동경만의 기적, 이런 것을 언급합니다. 그런데 기억하십쇼. 두 나라는 이미, 오래전부터 기술과 자본을 갖추었고 세계를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킬 만큼 강대한 나라였습니다. 홍콩이나 싱가폴, 대만 이런 나라들의 경제 기적을 말하지만, 이들은 강력한 상술을 가지고 있는 화교집단입니다. 자본과 마케팅 능력으로 거점무역이라고 하는 상술을 통해서, 경제를 일으킨 그런 발전의 일이었습니다. 그럼 기적이 무엇입니까? 이유를 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 기적입니다. 우리나라는 6.25전쟁으로 인해서 일본 식민지 이 후에, 완전히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일인당 국민소득이 전 세계에서 꼴찌에서 두 번째, 84달러였습니다. 오늘 세계 10위 권 경제대국이라 불리는 기적 중에 기적을 우린 지금 이루어 낸 것입니다. 경제를 논하는 국내 언론들은 한 번도 우리 경제를 밝다고, 대단하다고 하는 전망을 내놓지 않습니다. 경제 전망이 밝지 않다는 말로 위기와 긴장을 주었습니다. 이런 관점이 사실 우리 경제 발전에 기여한 바는 있을 것이지만,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위대한 기적을 이루어낸 민족의 자긍심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또한  기적적인 역사를 이룬 것에 대해서 감사를 누리지 못하게 한다는데 있습니다. 한국 축구가 월드컵 본선을 아홉 번 연속으로 진출하고 있는데, 이게 세계기록으로 따지면 여섯 번째 일입니다. 그런데 별로 감흥이 없습니다. 그게 축구냐! 이런 말만 하죠. 여러분 88올림픽 때, 재밌게들 즐기셨습니까? 그 때 저는 여러분들을 위해 나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온 겨레가 이 88올림픽을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하고, 협력하고, 또 하나가 되고, 가슴 설레면서 일을 치렀습니까? 89일 후에 우리나라에서는 평창에서 동계올림픽이 열립니다. 그때처럼 마음이 설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스포츠, 예술 심지어는 정치 민주화, 국가적 위상, 외교적 능력, 이 모든 것이 이렇게 발전했는데, 우리는 그다지 감사가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만큼 풍요해졌기 때문 아닐까요? 그만큼 넉넉하고 편안한 세월을 살고 있기에, 거기에 무심히 젖어있는 것입니다.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우리 시대와 같은 때였음을 내포합니다. 웃시야 왕은 다윗과 솔로몬에 이어서 유다의 황금기를 가져온 왕이었습니다. 대단했습니다. 열여섯에 왕이 되어서 52년 동안이나 왕위를 집권했습니다.  블레셋의 주요 도시인 가드, 야브레, 아스돗 성을 점령하고, 멸망시켰습니다. 지중해 연안을 따라 군사요지들을 곳곳에 세웠고, 도시를 세욱 엘롯이라는 군사요지를 재건축하고, 아라비아나 마온이나 또 암몬, 아람 이런 나라들을 점령했고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들로부터 조공을 받았습니다. 당대의 강국 중의 강국이 된 것입니다. 최대의 강국인 이집트까지도 위협을 받을 만큼 대단히 막강한 나라였습니다. 군사력을 최강으로 이끌어서 삼십여 만 명의 최신 무기에 정예 부대가 있었습니다. 나라가 부강해졌습니다. 편안해 졌습니다. 힘이 생기고 편안해지면 나타나는 위험한 현상이 있습니다. 뭘까요? 겸손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잃어버리고 긴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바로 이때인 것입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인 바로 그때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배를 잃어 버리게 된 시대입니다. 웃시야 왕은 이름도 너무도 좋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 얼마나 멋집니까. 열왕기하 15장에는 아사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도우셨다>얼마나 멋진 이름입니까. 은혜롭습니다. 무려 52년간 왕으로서 지냈습니다. 성경은 그를 평가하기를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라고 칭찬하는 말을 하고, 한마디 더 부연합니다. 산당을 제거하지 않았다. 산당을 제거하지 않아서 백성들이 산당에서 성전이 아니라 산당에서 저마다 제사를 드리며 저마다 분향을 하면서 살았다고 했습니다. (왕하 15:4)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 왕이 말년에 스스로 교만해져서 성전에 들어가 제사장이 수행하는 분향제사를 스스로 분향하려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습니다. 나병환자가 됩니다. 죽는 날까지 별궁에 거주하면서 비운의 종말을 맞이하였습니다. (대하 26장).
바로 그 때에 이사야에게 하나님께서 임하셨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선지자로 부르셨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하늘의 천사들, 스랍들이 영광스럽게 찬양하고, 하나님께서 그 중심에 앉아 계신 것을 봅니다. 영광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드리워져 있고, 성전의 문터가 문지방 터가 요동하고 그 성전 안에 하나님의 영광을 뜻 하는 연기가 구름이 가득한 것을 봅니다. 바로 그 때 이사야는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부르심의 감사>라는 말씀을 나누면서 시몬 베드로를 부르시는 주님 앞에 시몬이 어떤 고백을 했는지 들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정직한 자의 모습입니다.
세상에서는 대게 목소리 큰 자가 이긴다고 합니다. <내가 옳다! 나는 옳다> 법조계이든, 기업계에서든, 학계에서든 어디에서든 목소리 크게 나는 옳다고 소리쳐야 승리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할 것은, ‘나는 옳다’고 하는 사람은 세상 앞에 서 있는 태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의 부족함이 보여지기에 ‘나는 옳다’ 말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마다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발견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다. 성령님의 임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와 기도하면서 양심의 가책도 느끼고, 회개하며 부르짖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을 성경은 정직한 자라고 말씀합니다. 시편 7:10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여기에 정직한 자란 하나님 앞에 서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앞에 자신의 죄 성과 연약함을 바라볼 수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정직한 사람이라고 하셨고, 그 정직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며 그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우리의 만남. 바로 그것이 하나님 앞에 선 자들의 만남일 것입니다. 죄인으로서의 자기 이해 후에,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해 주심을 감사하며, 내 이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혼을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교회에서 우리가 나는 옳다, 나는 의롭다라는 치장을 한 채로 만나지고, 나는 옳다라는 마음이 가득하여, 그리고 서로를 대적하여 바라보고 있다면, 우리는 나를 위해 주님이 고난 당하셨고, 나로 인해 주님께서 죽으신 그 은총을 잊어버린 것일지도 모릅니다.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자신들의 심령의 죄 성은 덮어 놓고, 자신의 의로움을 강조하고, 자랑하며, 그리고 무엇을 했는지 아십니까? 그들은 주님을 죽일 모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중에는 아픈 이들이 많습니다. 억울한 이야기들 속에 얽혀서, 많은 양들 중에 여기저기 생채기가 나서 혼자서 숨어 울고 있는 그런 양들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아픈 것도 상한 것도, 또 약한 것도 들어 줄 수 있는 마음이 있을 때, 바로 그 자리에 성령, 또한 그 자리에 천국이 임하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의 유명한 저서가 있죠. 제목만 들어도 뜻을 다 알 수 있는 그런 책입니다. ‘상처입은 치유자’ 그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험한 세상 살 때, 성도라면 여러분, 누구나 상처를 입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이기 때문에 당해야 되는 어려움도 있고 원한도 있습니다. 바로 상처를 입은 자가 손을 내밀어 또 상처입은 자를 어루어 만져 주는, 그것이 교회 공동체요 성도의 만남인 것입니다. 함께 성경에서 답을 구하며 믿음의 동지로서 서로 격려하며 걸어가고 천국까지 함께 이르는 것, 바로 거기에 이 땅에서 임하는 하나님 나라가 있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사야의 고백 후에 나타난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자인 스랍이 제단의 숯불을 들어다가 그의 입술에 대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제단의 숯불로 그의 부정한 입술이 죄 사함을 받는 순간입니다. 나는 죄인이지만, 제단의 숯불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나를 씻어 주시고, 이 이사야를 정결케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그러자 이어서 이사야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8절 말씀입니다. 우리 다같이 8절말씀 봉독하시겠습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찾으시는 음성을 듣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한탄 섞인 음성으로 누군가를 찾는 것을 듣습니다. 이 음성에 이사야가 대답합니다. ‘제가 여기 있나이다. 누군가를 찾고 계시는 하나님. 부족하지만 누군가를 쓰신다면, 제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오늘 이 본문을  이사야 소명기사라고 할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장과 혹은 예언자를 부르는 기사들이 이렇게 기록됩니다. 오늘 신약의 시대에는 주님께서 오늘 우리들을 이와 같이 부르십니다. 시몬 베드로를 부르심처럼 우릴 향하여 왕 같은 제사장으로, 말씀의 전달자로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으시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기업들을 보면 사람들을 모집하면서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공통된 말입니다. 취업생들은 일자리가 없다, 없다 하는데, 사실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을 뽑으려 할 때, 사람이 없다, 기업 정신에 합당한 품성이나, 어떤 창의성이나, 능력이나 혹은 열정이나 관계성과 같은 그런 능력을 갖춘 사람이 드물다는 것이겠죠. 오늘 날, 자녀를 키우는 부모세대들이 참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부모님 세대들과는 달리, 오늘 30-40대 세대는 교육에 엄청난 관심이 많은 만큼, 스트레스도 그만큼 많습니다. 이전 세대에 비하면 물질적으로 풍요롭다고 하지만, 이 가정이라는 삶에서 스트레스가 많습니다. 위로 어른 세대, 특히 우리 아이세대를 키운, 어린 아이를 키우는 육아의 과정이 대단히 힘듭니다. 남들에게 뒤 떨어지지 않는 아이로 키워야 되겠기에, 자기를 가꾸는 것도 다 뒤로 미뤄 놉니다. 물질도, 시간도 모든 것을 아이에게 투자하면서 헌신적으로 키웁니다. 어느 정도 육아가 완성되고, 아이들이 10살 이상되면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돌아오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자식을 위해 너무도 많은 것을 희생한 나머지 자신의 예배와 자신의 신앙생활까지도 희생하고 만 것입니다. 사실상 그런 공백기를 거치고 돌아왔을 때도, 그들을 받아줄 공간이 없습니다. 이 부모 된 이들이, 30-40대 부모 된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그 아이들과 함께 예배할 수 있는 세심한 배려와 시스템이 부족한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 시대는 대단히 풍요로운 세대라 벌써 사회에서는 교육기관, 교통, 복지기관 모든 시설들이 교회의 시설을 앞 서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 육아 부모들을 위한 돌봄과 배려 없이는, 그런 돌봄과 배려는 뒤로 하고, 교회에 충성하라, 희생하라는 말을 강조하기에는 이 육아 부모들이 겪어야 하는 세상에서의 희생이 너무도 크고 힘든 상황입니다. 교회의 미래를 바란다 하면서, 바로 이 사람들을 세우고, 이 사람들을 품어내지 못한다면, 교회는 정말로 미래를 기대하기 힘들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하나님은 사람을 찾으십니다. 사람을 찾으실 뿐 아니라, 교회를 찾으십니다. 이  때에 우리는 들어야 할 하나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내가 어느 교회를 세상 속으로 보내며, 어느 교회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8:8입니다. 우리 다같이 한 번 읽어보시겠습니다. 귀한 요절 말씀입니다. 다같이 읽으십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오늘 시대 기독교인들은, 살아가는 자리에 손해나는 것들이 많습니다. 원한 맺힌 것들도 있을 수 있고요, 원망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유는 마지막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그 모든 것을 풀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 말씀하실 때, 이 시대는 주님 오실 그 때에는 노아의 때와 같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7절 이하에서 말씀은 이렇게 기록됩니다. 새번역 성경으로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이 인자가 올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홍수 이전 시대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며 지냈다. 홍수가 나서 그들을 모두 휩쓸어 가기까지, 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다. 인자가 올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마 24:37-39).
풍요의 시절에 노아의 때가 그러했습니다. 모두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며, 자기 것을 위해 살았습니다. 땅의 것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노아의 때에 홍수가 나서 휩쓸려 갈 때까지 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다는 말입니다. 하늘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세상의 홍수 속으로 그렇게 쓸려 가버린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 헌신하고 목양을 약속한지 33년, 그동안의 목회 과정에서, 신학과 목회 과정에서, 수많은 가정들을 보아왔습니다. 서울과 우리나라 지방에서, 미국을 포함한 해외의 교회들 속에서도 여러 가정들을 보며 안타까운 사례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교회도 점잖게 다니고 예배도 점잖게 참석하는데 인생의 말로가 웃시야처럼 비참하게 마무리 되는 그런 가정들을 보았습니다. 열심히 살았습니다.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학벌도 교양도 갖추었습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은 다 이룬 것 같습니다. 그런데 종래는 천국을 잃어버린 가족들을 보았습니다.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13절 말씀입니다. 다 같이 읽어보실까요?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출애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마음껏 부어주시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거칠고 메마른 땅 그 광야에서 하나님만 보게 하셨고,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을 먹었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만 따라 가게 하시며,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풍성한 훈련을 받았고, 연단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광야시대가 끝나고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풍요의 땅에서 먹고 마시며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로서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다음 세대가 아니라, 다른 세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그루터기를 말씀합니다. 영원한 희망이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으로 흩어질 것이요, 바벨론에 의해서 황폐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후세들은 결국, 그들은 바벨론 침략으로 다 끌려가고 황폐하게 되고 십분의 일이나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십분의 일 조차도 황폐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하나님께서 남겨두시는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해도 그 그루터기가 있을 것이다. 그 그루터기가 남아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거룩한 씨가 될 것이다.
가을이 깊어가는 이 계절에 우리의 감사가 무엇입니까? 상수리나무, 밤나무 같은 풍성함이 우리의 감사입니까? 예, 우리에게 그만큼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근본적으로 더 깊이 감사할 것이 있습니다. 그루터기로 남아 있음을 감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세상은 지금도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자아의 욕망, 땅의 욕망을 따르라는 철학과 풍조의 홍수 앞에 놓여있습니다. 그 홍수의 종래가 어떻게 될지 우리는 노아 시대에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배웠습니다.
마 24:40-42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을 터이나,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을 터이나,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너희는 너희 주님께서 어느 날에 오실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루터기요, 거룩한 씨로 이 땅을 지켜가는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창세 이래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역사가도 말했습니다. 역사는 창조적 소수에 의해서 발전을 지속한다고 말입니다. 오늘 거룩한 씨, 그루터기로 남아있는 여러분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씨앗이요 하나님 나라의 역사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그 믿음 가지고 세상을 이기고 깨어, 주님 오실 날을 기다리며 천국까지 이루어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를 구하는 기도]
하나님, 오늘 제게 일용할 양식과 이만한 건강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웃시야 왕의 시대처럼 편안한 때에 감사를 잃지 않게 하시옵고, 오늘의 감사를 내일로 미루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제게 주신 하나님 나라와 믿음의 사람들과 우리 교회를 감사합니다. 또한 저의 믿음과 예배를 지켜주셔서 노아의 때 같은 타락의 물결 속에서 주님 나라의 그루터기로 살아가심을 감사합니다. 늘 성령으로 깨어 말씀 속에 있게 하시고, 시대를 분별하며 우리 주님의 거룩하신 손 붙들고 천국까지 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사랑의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루어가시는 구원의 역사를 믿음으로 오늘도 저희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예배하며 감사의 계절을 지내고 있나이다. 주님께서 저희를 부르신 은혜에 감사하고, 오늘 시대에 저희를 그루터기로 삼아주심을 믿고 감사를 드리옵나이다. 또한 저희가 구하옵기는, 주께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실 때면 저희 교회를 보내어 주시고, 우리 성도들의 은사와 인생을 거룩한 씨앗으로 사용하여주셔서, 주님 오실 때 찾으실만한 그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부르심에 감사 김창운 담임목사 2017.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