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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복으로 돌아갑시다 (2017.10.29)
설교자     김창운 담임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시편 112편
 
 
본문 내용
1.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 그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
3.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음이여 그의 공의가 영구히 서 있으리로다
4. 정직한 자들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이로다
5.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
6. 그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함이여 의인은 영원히 기억되리로다
7. 그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8. 그의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의 대적들이 받는 보응을 마침내 보리로다
9.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고 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리로다
10. 악인은 이를 보고 한탄하여 이를 갈면서 소멸되리니 악인들의 욕망은 사라지리로다
Content

                             시 112 참 복으로 돌아갑시다.
오늘은 우리 개혁교회가 종교개혁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특히 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500년 전 종교개혁. 그것은 필연적인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요 교회를 세우신 주님께서 친히 일하신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 이 있기 전에 교회, 즉 로마 카톨릭교회는 부패하였습니다. 구원을 사고 파는 “면죄부”를 발행하면서 교회가 재물을 쌓고 부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또한 권력을 누렸습니다. 교황청을 중심으로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세계 도처에 이르는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결국 물질이 쌓이고 권력이 생기자 본질을 잃었습니다. 말씀을 잃어버렸습니다. 참된 예배를 잃어버렸습니다. 권력의 이권을 위해 말씀을 남용하고 왜곡했습니다. 믿음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믿음 대신에 권력과 돈을 쫓으면서 교회의 본질, 즉 주님이 명하신 선교적 사명을 잃어버렸습니다. 교회는 본질을 잃어버리고 땅끝을 향해 가시는 성령의 역사를 오히려 방해하고 가로막는 꼴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인 된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 피로 값 주고 세우신 공동체요, 주님이 친히 머리 되시는 신령한 몸인 것입니다. 그런데 머리 되신 주님이 지시하는 데로 움직이지 못하는 교회는 병든 것입니다. 주님은 이 몸을 새롭게 해야 했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그렇게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세워 교회를 개혁하게 합니다. 1517년 10월 31일 금요일, 독일의 마르틴 루터로부터 일어난 종교개혁 운동은 스위스의 울리히 쯔빙글리 (Ulich Zwingli)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한 세대 후배인 제네바의 장 깔뱅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때 깔뱅은 종교개혁 정신을 더욱 발전시켜 5대 강령을 정리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장로교회의 신앙적 모체가 됩니다. 이 강령 속에서는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와 성도의 삶이 어떠함을 정리한 것입니다. 그 다섯 개의 제목만 보겠습니다. 1.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입니다. 사람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도 착한일을 할 수도 있고 선한 마음과 의지를 가질수도 있지만 하나님에 온전한 선 온전한 하나님께 온전한 영광을 돌릴만한 그런 선을 이루기에는 미진한 존재다. 2.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입니다. 그러한 인간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구원하셨습니다. 조건없이 무조건적으로 말입니다. 3.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 졌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에게 열렸으나 그것이 모두에게 영접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오늘도 복음이 대한민국사회 모두에게 열려있지만 그것을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속에 여러분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복음을 누리고 구원에 길에 서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하나님 제한적 구속 속에 우리가 들어있는 것 참으로 감사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제한적 구속(Limited Atonement)입니다. 4.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에게 은혜를 주시는데 이것을 절대적 은혜입니다. 즉 성도들의 마음과 그 의지 안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구원의 목적을 이루시는데 결코 그것을 실패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구원의 완성을 이루신다는 뜻이지요. 마지막 5.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입니다. 우리 성도는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가. 하나님의 절대적 은총을 붙잡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천국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이루실 구원에 자리에 이르기까지 인내하고 인내하며 연단받고 훈련받으며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 5섯가지가 강령이 우리 믿음의 기초였습니다. 여러분 올해 우리는 우리교회의 목표 표어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은총에 올해 우리 교회의 목표였던 “다시 거룩한 교회로!” 이 표어는 지난 10개월 동안 우리 눈에 익숙해졌을 것입니다. 이 표어가 송구영신예배나 신년예배에 한번 읽는 구호에 그치지 말아야 할 것은 지금 이 때에 우리 교회를 향해 절박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올해 우리는 벧엘교회 59년을 맞이했습니다. 내년 60주년을 맞으면서 또 한국교회를 지켜보는 여러분들 시선 속에 누구나 여러분 스스로가 개혁의 때가 무르익었다고 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계실 것입니다.
개혁이란 무엇입니까? 영어로는 Reformation이라고 했습니다. 접두어가 RE-다시라는 말이요, 몸통어는 Form- 모습 상태 형상을 뜻합니다. 그 형상에 대해 쓰는 용어들이 많습니다. Conform이란 말은 ‘똑같이 따라한다’는 말입니다. Transform 이란 그 형상이 ‘변화한다’는 말입니다. Reform이란 개혁한다는 말인데, 성경이 말하는 본래의 정신을 회복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개혁은 구호가 아니라 행동이요, 역동적 몸부림인 것입니다. 오늘 시편의 기자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우리 신앙의 본래 자리가 있습니다. 그것을 세가지로 함께 생각해보기로 합시다.
1. 믿음의 회복입니다. 1절 말씀을 읽어봅시다.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12:1) 이 말씀을 쉬운 말로 하자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똑바로 아는 것입니다. 안다고 하는 말은 지식 수준의 앎이 아닙니다. 정말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이 온 우주와 역사의 주인이시자, 내 속에 영으로 살아계시다는 이 사실이 가슴으로 영으로,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머리만 아니라 인격 전체로 말입니다. 나의 지식은 물론 나의 감성과 나의 의지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나아가 몸으로도 행동으로도 말입니다. 그리하여 무엇보다 내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이 객관화 되는 것입니다. 새롭게 나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그것까지 이르러야 되는 것입니다. 깔뱅이 첫 번째 강령처럼 우리는 정말 타락한 존재입니다.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악을 미워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정말 온전한 의에 이르지 못합니다. 솔직히 죄의 모습들이 있습니다. 오로지 우리 인생에 남을 것은 다만 예수를 믿었기에 구원받은 것 이거하나 뿐입니다. 뛰어난 재력이 있습니까? 학식이 있습니까? 실력이 있습니까? 기능이 있습니까?아름다움이 있습니까? 죄송하지만 이모든 것은 유통기한이 있습니다. 백세시대 그렇다면 백년뿐입니다. 인생에 남게 될 것은 오로지 유일하게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가게 되는 이 사실 밖에 없습니다. 고로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보물이 무엇입니까? 다이아몬드도 거대한 금괴도 주식증권도 아닙니다. 오로지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천국가는 믿음 예수님을 믿음으로 천국가게 되는 이 믿음 이것을 굳건이 붙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고성장의 시대를 거쳐 저성장의 시대 혹은 성장 유지 시대입니다. 성장 시대에 신앙은 세상의 번영과 함께 번영하는 것이 복 받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장시대의 마인드요, 그 시대는 끝났습니다. 지금 우리는 새로운 신앙적 관점이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신앙의 페러다임 가져야 합니다. 그것도 투철하고 철저하게 말입니다. 여러분 성장시대에 가졌던 수량적 마인드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습니다. 이제 정말로 인생의 평가는 교회 평가는 신앙의 평가는 질적 내용으로 평가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말세가 가까워 옴으로 믿음 사라지는 것처럼 자들의 줄어드는 것처럼 새로운 전환점에 들어섰습니다. 성경 말씀 6절을 읽어봅시다. 그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함이여 의인은 영원히 기억되리로다(시 112:6).
하나님께서 구원의 백성들을 위해 이루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 영혼을 택하신 하나님께서는 무조건적 은혜요 저항할 수 없는 은총 속에서 그를 의롭게 해가고 계신다는 사실 이것을 우리가 객관화하며 바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정한 것이 아니라, 택한 백성으로 하여금 예수를 믿고 구원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을 내 인생 속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 신앙인의 간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남자분인데, S대학을 나오고 돈 많은 집에서 태어난데다 최고의 직장에서 다니다가 일찌감치 독립을 하여 사업을 했습니다. 사업이 잘 되어서 부동산도 수만평, 주식도 어마어마하게 잘 되어 그야말로 돈방석에 앉았습니다. 돈이 많게 되자 집안일을 등한히 하고 룸싸롱을 드나들고 다른 여자를 만나고 바람을 폈습니다. 그러다가 한 순간 사업이 망하면서 부동산도 주식도 다 날렸습니다. 빚만 40억 남게 됩니다. 사기 혐의를 쓰고 감옥에 가게 됩니다. 3년을 살고 돌아와 남의 집 지하방에서 라벨을 붙이는 일을 하며 근근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로 이 상태에 있는 분인데, 간증을 합니다. 그런데 그 고백이 귀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그 많은 재산 다 날리게 하시고, 큰 실패의 길로 가게 하셔서 저를 주님께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목이 메어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천국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고난이라는 보석 같은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흥미로운 그 분의 아내의 간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비참한 시간을 통해 하나님은 저를 구원하셨습니다. 학벌도 집안도 사람들의 눈초리도 모자람 없이 살아온 인생인데, 남편이 바람을 피는 것을 알았을 때 죽고 싶었습니다. 심지어 사업이 부도나고 게다가 감옥에까지 가게 되었을 때 저는 절망의 낭떠러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저를 끌어주셨습니다. 언제나 저 잘난 맛에 살아오면서 교만으로 가던 저를 남편의 외도와 실패와 감옥이라는 시간을 통해 저의 교만을 돌아보게 하시고 주님께로 돌아오게 한 것입니다. 이런 고난의 보석을 말씀 속에서 깨닫게 하셨음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이런 고통의 시간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위로하며 구원의 길을 전파하려고 합니다.” 오늘의 시편 4절 말씀은 이렇게 들려줍니다. 정직한 자들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이로다 (시 112:4).
여기에 정직한 자란, 하나님을 바라보며 구원의 길을 가는 사람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이 구원의 길을 가는 자녀에게 한없이 자비롭고 긍휼이 많은 분이십니다. 그럼으로 우리에게 흑암과 같은 고난의 시간 속에서 구원의 빛을 이루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흑암 중에 빛을 이루시면서 우리를 보석처럼, 정금처럼 이끌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불가항력적 은혜, 저항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인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천국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며 이끄시며 또 이끌어 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썩어 없어질 것들 그것에 목에 메이 었을 때 그것들을 치시며 버리고 떨어뜨리게 하시며 천국을 선택하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거룩한 성도! 오늘 우리에게 천국의 길로 인도하심으로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굳게 믿으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참된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2. 가정의 회복입니다. 2,3절을 읽습니다. 그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음이여 그의 공의가 영구히 서 있으리로다(112: 2,3)
믿음의 사람들은 그의 후손에 이르기까지 강성함과 복된 은총을 누린다 말씀합니다. 부와 재물이 그 집에 가득하다고 하는 것은 물질적인 복에 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부어주시는 천국 구원의 복이 그 집에 있고 공의, 즉 하나님의 의를 구원받은 자의 집에서 이루시는 분인 것입니다. 이렇게 후손과 그 집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성도 개인에게만 관심을 갖는 분이 아닙니다. 태초에 세상을 만드시고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은 가정을 만드셨습니다. 그 가정을 기뻐하시고 복 주시며, 가정을 통하여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하여 가는 것은 천국의 길이 자손들에게까지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 은혜를 말합니다. 이것은 오로지 우리 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역사에 유명한 장로님이 있습니다. 유계준 장로님입니다. 목사님 중에 주기철 목사님이 훌륭한 어른이라면, 이 주기철 목사님을 열심히 돕고 보좌하시던 산정현교회 장로님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투옥되었을 때 목사님 사모님과 자녀들을 위해 쌀과 살림을 늘 공궤하시던 분입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교회를 지키기 위해 남아있다가 공산당에게 죽음을 당한 순교자입니다. 그 자손들이 얼마나 잘 되었는지 미국의 조나단 예드워드 목사님의 자손에 비견되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분의 손녀딸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의사 남편을 만나고 미국으로 유학을 하고 자녀까지 미국의 유수한 대학을 나오고 잘 자라고 있었는데, 어느 날 조용히 집에 찾아와 어머니에게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아이를 가졌다고… 이 부부가 고민 고민하다가 몰래 낙태를 했다고 했습니다. 약 20년이 지난 후에 이 사실을 고백하면서, 자신의 부끄러운 죄를 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귀한 믿음의 가정이요, 그야말로 박사 총장 교수 의사 등 사회 엘리트의 가정이라 하지만, 그 가정에 이런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함부로 했던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그렇다고 이것을 우리가 정죄하거나 그 집안의 신앙 내력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인생들마다 사실 특별한 것이 없고, 천국 백성으로 남는 것만이 소중하듯이, 어떤 가정에도 어려움이 있고 고난도 있고 겉으로는 드러내지 못하는 아픈 사연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가정 속에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자식들이 S대를 가고 대기업에 입사하고 사업에 성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하게 믿음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가정을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가정마다 소망이 있고, 그 소망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거룩함이 있는 것입니다.
근래 사람들은 걱정이 많습니다. 아이를 낳는 것이 아이를 고생시키는 것이라는 이상한 논리로 아이를 낳기를 거부합니다. 자신이 자신 인생의 주인이 된 교만입니다. 후손에게 이어줄 생명과 복을 자신이 결정하여 하나님의 소망과 거룩함을 거절하는 범죄인 것입니다. 모든 생명은 소중합니다. 심지어 어떤 실수를 하여 갖게 된 아이라고 하더라도 그 생명의 주인은 여러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생명의 주인이신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죽일 권리가 사람에게 없듯이,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거두어버릴 수 있는 권리는 우리에게 없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백성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듯, 구원 백성의 가정 또한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핵가족화와 저출산이라는 시대의 풍조를 따르는 (Conform) 세상 사람이 아니라, 천국 백성에게 속하여 후손에 후손에 복된 소망을 지닌 거룩한 백성임을 기억하여 가정마다, 가문에 이르기까지 참된 소망으로 가득한 가정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마지막으로, 공동체의 회복입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가 선진국화 되면서 사라진 것이 있습니다. 마을이 사라졌습니다. 아파트 문화와 도시문화 속에서 점점 이웃문화 마을 문화가 없어졌습니다. 한마디로 공동체가 사라진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큰 위기를 맞게 합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이미 성경은 <더불어 사는 삶에서 참된 복>이 오는 것을 말씀합니다.
5절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 (시 112:5). 사람은 베풀며 도와주며 살아갈 때 복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교회처럼 모이게 하셔서 그곳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가정이야말로 가장 핵심적인 공동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정뿐 아니라, 서로 더불어 사는 공동체 됨을 원하셨습니다.
지난 주에 광고 드린 대로 목회 세미나를 잘 다녀왔습니다. 경기도 판교에 있는 우리들교회의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우리 교회의 비전과 여성 사역을 위해서 사모와 함께 다녀왔습니다. 제가 그 교회를 택한 것은 그 교회를 연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참으로 감사했던 것은 지난 20년간 머리 속에서 그려오면서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던 교회의 상을 정리하는데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교회의 공동체성이 그야말로 약동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그 원리와 방향들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 인상적이었던 것은 앞에 말씀 드린 간증들이 교회에서 스스럼 없이 고백되는 것입니다. 외도를 하고 혼외 자녀를 두고 감옥을 가고 사업을 망하고 하나님 주신 생명을 함부로 낙태를 했던 부끄러운 이야기들을 말입니다. 심지어 목장모임의 헌금을 훔쳐 안마시술소를 간 애기도 합니다. 대부분 교회들이라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랄 것입니다. 그리고 말할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을 저지르면서 버젓이 교회에 나올 수 있느냐>고 비난할 것입니다. 그때 그 사람은 자신은 옳다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와 허물은 가면 속에 감추어둔 채 저 객체를 비판하고 정죄하는 습관이 언제부턴가 생겨났습니다. 신종 바리새인이요 사두개인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들을 다 물리시고 이 여인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요 8:11). 주님이 정죄하지 않으셨다면, 누가 누구를 정죄하겠습니까? 사람의 인생이란 결국 어떤 특별한 사람도 뛰어난 사람도 없습니다. 인생이 오로지 예수님을 믿게 되어 구원을 얻게 된것만 이것만이 우리 인생에 남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견인을 함께 하며 삶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이 교회의 공동체성입니다. 아픈 이야기를 나눌 때 함께 아픕니다. 죄를 인정하거나 그것을 묵인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그러한 실수와 고난의 시간을 통해 흑암에서 빛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함께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돕고 손잡아주며, 천국 가는 길까지 함께 도와가며 걸어가는 것, 이것이 예배의 모임이요, 목장의 모임이요, 공동체의 모임인 것입니다.
9절에도 이렇게 기록됩니다.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고 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리로다(시112:9) 사람의 행복은 서로 나누고 특히 어렵고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줄 때 복이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행복이 있을뿐더러, 그것을 의로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머슬로라는 심리학자는 사람의 욕구 중에 소속감의 욕구라는 것를 말합니다. 어떤 속에 소속하여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며 서로를 아껴주는 사랑의 관계가 있을 때에야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한 분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해당되시는 분은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이 분이 대기업에 임원으로 오랫동안 다니다가 퇴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남자가 퇴직을 한다는 것은 크나큰 위기요 아픔입니다. 까마득한 절벽이 앞에 놓이는 시기입니다. 이때 이분이 주일날 교회에 왔는데, 사람들을 만나고 웃고 악수하고 인사를 하고 있지만, 누구한테도 말을 할 사람이 없더랍니다. <나 지난 주에 회사에서 퇴직했습니다> 이 말 한마디 할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교회가 건강한 것입니까? 과연 머리되신 주님께서 지체된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 하신 말씀이 제대로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 모두가 아픕니다. 너도 아프고 나도 아픕니다. 바로 옆에 계신 분도 예배를 드리기 위해 가장 좋은 옷차림으로 나와 앉아있지만, 실은 그 분도 그 속에 죄도 있고, 덮어 놓은 사연도 있습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아니라, ‘인생이니까 아픈 것’입니다. 특히 성도라면 더욱 아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때때로 고난의 흑암 속에 두시면서 빛으로 이끄시기 때문에 벗어내야 되고 떨궈내야 되고 씻어내야 하는 아픔이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객관화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누군가 마음을 열어 그 자신의 약함을 토로할 때 그것을 정죄하거나 조롱하거나 그것을 얘기꺼리로 삼아 소문을 내거나 뒷얘기를 한다면 그영혼은 지극히 병든 영혼입니다. 그 영혼은 위선과 억압에 탈을 쓰고 스스로 천국 구원의 길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중인 것입니다. 주님은 그 때 가장 아픈얼굴로 가장 아픈표정으로 바라보고계십니다. 오늘 한번 옆자리 계신 분께 전후좌우로 이야기 해보십시오. 내가 아픕니다! 내가 아픕니다! 공동체의 시작은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그 아픔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함께 손잡을 수 있것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나홀로족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청년들 중에 더욱 그렇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가끔 뉴스에 홀로 지내던 사람이 사망한지 몇 달 만에야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얼마나 가슴이 아픕니까? 공동체가 사라져가는 이 땅에 대안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라입니까? 교육기관 복지 기관이 할 수 있습니까? 교회가 희망인 것입니다. 적어도 흑석동에서 외로운 자들을 담아낼 수 있는 곳이 어디냐 한다면, 저 벧엘교회를 헤아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부부 싸움을 하고 답답하면 상담소 생명의 전화가 아니라, 우리 목장의 식구가 기억나야 할 것입니다. 돈 관계는 단 만원도 있어선 안됩니다. 정말로 건강한 영혼의 공동체로서 우리 벧엘교회가 살아나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목장이 살아나야 하는 것입니다. 공동체가 살아나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이 때에 성도의 아픔을 함께 울 수 있는 눈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저 장로가 저 권사가 어쩌면 저럴 수가!> 라는 말로 정죄하며 자신의 양심과 영혼을 억압하던 일은 멈추어야 할 때입니다. 정말로 말씀 속에서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보며, 예배에서 목장에서 함께 천국까지 갈 영혼의 손을 붙잡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서로가 함께 손을 잡고 구원의 길을 걸어가는 사랑으로 거룩한 교회를 이루며, 참된 복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를 구하는 기도] 하나님,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오늘 다시 한번 깨달으며 주의 말씀이 제게 살아 역사하시기를 원합니다. 저에게 은혜를 주셔서 천국까지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거룩함이 더해가는 인생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가정이 하나님 원하심처럼, 후손에서 후손으로 이어지는 천국인이 되는 소망이 깊어지는 거룩함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교회에 성령님 살아 역사하여 주시고, 살아계신 주님의 사랑이 내 속에 깊이 스며들어 (000)을 위해 손을 내밀고 함께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사랑의 주님, 종교개혁주일입니다. 500주년이라 기념하고 있지만 이 날 수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정직히 서서 벌거벗은 모습으로 돌아보며 회복되어야 할 시점인 것을 깨닫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우리 성도들의 심령에 사랑으로 깊이 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들의 가정 가정마다 이어지고 또 이어가는 소망이 하나님의 은혜로 넘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교회에 함께 해온 믿음의 식구들, 또한 찾아오는 영혼들, 우리들의 예배와 만남, 목장들 속에 손잡고 함께 울며 천국길까지 동행하는 거룩함이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김창운 담임목사 2017.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