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벧엘방송 > 주일설교 
  한 회심자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 (2017.10.15)
설교자     김창운 담임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사도행전 9장 10-31절
 
 
본문 내용
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12.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23.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24.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25.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28.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Content

                

              행 9_10-31 한 회심자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
“주여 뉘시오니이까?” 이 물음은 한 회심자의 물음입니다. 초대교회가 막 싹을 티우고 줄기가 솟을 무렵 교회를 박해하던 사울이라는 인물이 주님께 올린 물음입니다. 주님은 다메섹의 교회를 멸하러 가는 사울을 부르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다급한 부름입니다. 그리고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의 광채로 눈이 멀어버린 사울이 주님을 향해 던지는 영혼의 기도입니다. “주님은 누구이십니까?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이것은 주님을 향한 우리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지난주일부터 이 사울의 회심이야기와 1,2,3부 예배에 같은 말씀을 보면서 우리 온교회가 주님을 향해 드릴 말씀과 들어야될 말씀을 함께 생각해 보는 것이 제 소망입니다. 사울에게 주님이 답하셨습니다.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그리고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하셨습니다. 뜻모를 말씀입니다. 제가 언제 박해하였습니까? 해보다 더 밝은 주님의 광채로 눈이 멀어버린 사울은 다메섹으로 들어가 삼일 동안 암흑의 시간을 지냅니다.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했습니다. 오로지 단 하나, 모든 것으로부터 차단되고 주님과 대면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여기에 깊은 기도가 있습니다.
주님은 11절에 보면 ‘사울이 기도하는 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육신의 눈은 닫혔습니다. 그 대신에 내면의 시력이 열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수없는 질문들이 올라옵니다. ‘죽은 줄로 알았던 나사렛 예수가 놀라운 광채로 나를 찾아와 말씀하셨다!’ 영혼의 시야가 떠지면서 그는 그가 지녔던 신념과 행위들을 돌아봐야 했습니다. ‘예수라니! 부활이 사실이었던가? 그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었던가? 그렇다면 정말 내가 하나님의 아들을 박해하고 있었다는 것인가? 수많은 질문 속에서 그간 그토록 자신 있었던 자아가 무너지는 것을 느낍니다.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인가? 이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예수님이 과연 부활하셨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분명하다면 주님은 내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묵상하며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이 회심자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만날 수 있습니다.
첫째, 주님은 사울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하셨습니다. 어찌 생각해보면, 주님이 왜 이 사울이 교회를 잔멸하고 핍박하는 것을 두고 보고 계셨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그로 인해 희생당한 수많은 성도들이 있었다면 그들의 희생이 가엾지 않습니까? 행 5장의 아나이아와 삽비라 부부처럼 당장에 그를 쳐서 심판하실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그를 두신 것은 그가 주님을 핍박하는 죄를 짓도록 허용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울 자신이 그토록 의롭다고 믿고 있지만, 그의 내면에는 본래 죄성으로 가득한 사실이 드러나도록 허용하신 것입니다. 시편 51편은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나단 선지자의 비난을 받은 후 회개하는 시입니다. 그 중 51:5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이것이 정직한 영혼의 고백입니다. 순간적인 실수로 잘못을 저질렀다는 변명이 아닙니다. 내 속의 죄의 실체가 밧세바 사건을 통해 드러났다는 깊은 고백인 것입니다. 인간의 심연에 드리워진 죄성은 언제든지 공기로 가득 찬 풍선처럼 톡하고 터질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떤 명분이나 구실이나 분쟁의 빌미가 있으면 그것이 터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은 우리에게 <모든 지킬만한 중에 네 마음을 지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울이 그러했던 것입니다. ‘나는 자랑스런 유대 바리새파의 최고 지성이요, 최고 신앙자요, 최고 실력자요, 자타가 공인하는 의인’라고 자부해온 그가 본래 죄인이었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그간 자부했던 모든 것들이 도리어, (빌 3:8의 기록처럼) 배설물로 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가장 고상한 지식, 참 진리이신 예수님을 만난 순간 말입니다. 이것이 회심이었습니다. 주님의 진리와 사랑 앞에서 죄의 실체를 깨닫게 해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사울의 회심 속에서 우리는 깨닫습니다. 어떤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존재의 이유와 목적을 알지 못합니다. 절대 진리이신 주님 앞에 섰을 때 비로소 사울은 주님의 거울 앞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실체를 정확히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고 주님이 그 죄를 발견하게 하심으로 죄책감 들게 하시고 괴롭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 죄를 깨닫게 하실 뿐 아니라, 그 죄를 씻어 주십니다. 그 죄로 인한 괴로운 인생을 고치시시며 자유케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통하여 온 우주의 창조주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 되심을 깨닫게 하시고, 인생의 앞길을 어떻게 살아갈지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회심자 사울의 새 인생은 거기에서 출발합니다. 성도 여러분! 자신의 실체를 주님앞에서 발견하고 그리고 주님에 씻어주심을 입은 것 처럼 오늘 우리의 인생에 우리를 다급하게 부르시는 주님앞에서 우리를 비춰보며 주님 앞에 우리를 고백하고 씻어주시는 주님 앞에 우리가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주님은 사울로 하여금 주께서 택하신 자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사울이 이 삼일간의 침묵과 회개와 금식의 기도 시간에 아나니아라는 사람을 부르십니다. 사도행전 5장에도 아나니이가 있지만 여기에 같은 이름의 아나니아는 신실한 제자였다고 누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찌감치 주님을 만나 다메섹에 거하며 주님과 친밀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아나니아야!” 하고 부르실 때, 즉각 주님을 알아보고 “제가 여기 있나이다” 대답을 합니다. 주님이 이 사람에게 말씀하시죠(11,12절).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사울은 이미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와서 안수해서 눈이 뜨게 될 것을 환상으로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나니아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여쭙습니다. “이 사람은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입니다.” 그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해 택한 나의 그릇이다.” 그러자 이 아나니아가 두 말 없이 말씀하신 직가의 집으로 가서 사울에게 안수하였다고 했습니다. 이 안수를 받을 때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가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며 기력을 회복했습니다.
주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다 맞추어 놓으신 것입니다. 주님의 신령한 계획 속에서 말입니다. 이 사울이라는 인물과 아나니아라는 인물을 각자의 자리에서 부르시고 만나게 하시면서 이 계획 속에서 주님이 택하신 자, 주님이 쓰시는 자, 주님께서 연결해 가고 계셨던 것입니다. 사울은 후일에 갈라디아서에서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하셨고, 나를 주님의 은혜로 불러주셨다”고 말입니다.(갈 1:15).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택정하신 분입니다. 우리 어머니의 태로부터, 아니 그 이전 창세로부터 우리를 택정하셔서 주님의 은혜로 우리를 불러 주신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 중에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셨으므로 우리는 꽃과 같이 아름다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무의미한 몸짓이 아니라, 아름다운 꽃과 같이 향기 나는 인생인 것입니다.
그 택하심의 증거가 궁금하십니까? 영과 진리의 이 예배에 참여한 우리의 발걸음에 그 증거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남으로서 영혼의 생명력을 누리고 기쁨과 평강을 누리게 됨이 그 첫째 증거인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 기도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택정하심의 증거입니다. 우리 중에는 기도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기도가 체질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택하심은 받았는데 기도에 익숙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유아 시절부터 하나하나 배워 오늘 멋진 모습이 되었듯이 기도도 배워야 합니다. 매주 [은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하루에 세 번씩 소리 내어 읽으세요. 기도는 하시면 됩니다. 학식도 상관없고 언변도 상관없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시면 성령께서 나를 감화해주셔서 기도가 습성이 되고 언어가 되고 체질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택정하심에 증거가 더하시기를 바랍니다.
예배와 기도, 그리고 또 택하심의 증거는 하나님께 쓰임의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쓰인다는 말은 비단 교회 직분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와 기도를 통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응답의 은혜를 누립니다. 그 응답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빠져 나와 오로지 천국의 시간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 가장 큰 응답인 것입니다. 그 기쁨 속에서 주님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는 뜻을 볼 수 있게 하십니다. 즉, 당장에 이대로 천국 가면 좋은데, 주님이 나를 데려가지 않고 살려두시는 것은 이제 그 기쁨 가지고 세상을 향해 나를 보내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세상 속에서 만나는 것이 가족이건 직장이건, 이웃이건 성도이건 어떤 상황이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매개체로 나를 쓰고 계심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주님 한 분으로 인해 기쁜 마음 가득하여 세상으로 나아갈 때, 아무 염려 하지 마시고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의 소원대로 행하시면 됩니다. 전하라 하시면 전하시고 나누라 하시면 나누시고 섬기라하면 섬기시고 일하라 하시면 일하시고 그러면서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나아가시면 점점 그 인격과 삶의 자리에 의의 열매들이 맺혀지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택정하심을 입은 자의 복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의 눈에서 과거 옛사람의 비늘이 벗겨졌듯이, 우리의 영의 눈이 새로 뜨임으로 인해, 택하심을 받고 그 은혜로 부르신 주님으로 인한 감사와 기쁨이 더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 셋째, 주님은 이 회심자를 통해 만민을 향하여 복음이 전파되도록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나니아에게 사울을 통해 하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십니다. 즉, 주님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택하신 그릇이라고 했습니다. 이방인을 향하여 나아갈 성령님의 도구인 것입니다. 과연 사울은 몸이 회복되자, 즉시로 다메섹에 있는 회당으로 가서 예수님의 이름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듣는 사람들이 의아해 합니다. <저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멸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끌고 가려고 온 것 아니냐> 그런데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담대히 전했습니다.  28절 말씀에 보면 예루살렘에 다시 돌아가 주님의 본래 제자들과 함께 주님이 이름으로 담대히 말했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의 헬라파 유대인들에게도, 다메섹 회당의 유대인들을 향해서도 예수의 이름을 담대히 말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예수와 교회의 박해자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전도자로 변한 것입니다. 만민을 향한 선교사 말입니다. 놀라운 것은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자신이 지닌 과거의 모든 자랑거리를 배설물처럼 여겼을 때, 주님은 그것을 들어 주님 나라를 위해 쓰셨습니다. 그의 지성과 그의 학문, 그의 신분과 그의 언어 능력, 그의 필력과 열정을 쓰셔서 신약성경에 가장 많은 책들을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일은 고난을 동반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주님께서 사울에게 계시한 말씀을 아나니야게 들려주시는데,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그에게 보여주신다고 했습니다. 회심, 택하심,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함께 하는 공식이 있습니다. 고난입니다.
사도행전은 앞으로 사울이 어떻게 열심히 선교하는지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가 어떻게 고난 받는지를 보여줍니다. 그가 어떻게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죽을 지경에 이른 장면을 보여줍니다. 그가 어떻게 빌립보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매맞고 투옥되었던 사실을 전해줍니다. 에베소의 대중 폭동에 휘말려 곤혹을 치루고,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투옥되고, 지중해에서 폭풍우에 난파되어 죽음의 위기를 맞았으며, 마지막에는 로마에서 어떻게 구금되었던 지를 보여줍니다.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에는 고난 받는 일이 포함됩니다. 오늘 내게 고난이 없다면, 그 이유는 두 가지, 신앙은 주님과 멀어져 나태해져 있든지, 주님을 전하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본 회퍼 목사님은 말씀합니다. <고난은 참된 제자도의 상징입니다.> 여러분도 각자의 머리에 드리워진 고난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심지어 교회의 사역 속에서 당하는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나를 택하여 부르시고, 나를 쓰시는 증거입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아프니까 성도요, 아프니까 택한 자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 고난이라는 말에 덜컥 겁을 낼 필요가 없습니다. 복 받고 편안 하려고 예수 믿었는데 고난을 받는다면 예수 믿는 걸 고려해볼까 하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선한 일을 할 때는 방해 세력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고난의 때에 견딜 힘을 주실 뿐더러, 그 고난을 통해 단련하시며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신비입니다. 또한 그때마다 주님은 그 때마다 위로의 손길을 주셨습니다. 사울은 삼일간의 침묵 시간 끝에 아나니야라고 하는 신실한 제자의 위로를 받습니다. 그가 사울에게 안수를 할 때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17절 말씀에 보면, “형제 사울아!-나의 형제 사울이여”하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형제를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십니다.” 이 말은 사울로서는 회심한 후 주님의 제자의 입을 통해 들은 첫 마디였습니다. 얼마나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위로자들을 보내주시는 주님이신 것입니다. 다메섹에서 유대인들에게 살해의 위협을 당할 때 주님의 이름없는 제자들이 그를 광주리에 담아 성밖으로 탈출을 시켜줍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주님의 제자들이 의심과 불신으로 사울을 만나기 꺼려할 때 주님은 바나바라는 위로자를 통하여 사울의 회심을 증거하게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헬라파 유대인들이 사울을 미워하여 죽이려 할 때도 믿음의 형제들이 사울을 보호하여 가이사랴를 통해 그의 고향 다소로 피신 시켜 주었습니다.
주님은 모자람이 없으신 분입니다.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분입니다. 모든 사건, 모든 고난의 순간마다 주님은 사람을 보내어 사울을 위로하시며, 담대히 만민을 향해 주의 말씀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주님으로 인해 고난을 당할 때 주님께서 보내주시는 사람들이 있음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회심케 하시는 성령께서 여러분 속에서 일하심을 믿으시며, 고난의 자리에서도 더욱 담대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31절의 말씀이 오늘의 결론이 될 것입니다. 유대와 갈릴리, 사마리아에 교회가 든든히 서 갔다고 했습니다.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인해 성도들의 수가 많아지고 있었습니다. 박해가 교회를 방해하지 못합니다. 교회가 평안하다 했습니다. 외부적인 편안함은 신앙의 나태함을 유발하는 경우가 많지만, 초대교회는 오히려 든든해졌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령께서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통해 일하시는 성령님께서 회심자들로 하여금 주님의 택정하심을 깨달아 예배와 기도에 힘쓰고 주 예수의 이름을 전하는 일이 그치지 않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벧엘교회의 역사, 여러분들 인생 역사에 이 일들이 쓰여짐으로 평안 중에 든든해 가는 벧엘행전에 주인공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를 구하는 기도] 사랑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가 모태로부터 택하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으며, 저를 늘 그 은혜로 부르시는 주님 안에 늘 거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택하신 주님의 은총으로 오늘도 예배하며, 기도하며, 회심의 정로(正路)에 섰으니, 성령님께서 제게 기도의 체질과 습성으로 살아가도록 감화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제게 맡기신 일을 감당하며 주님의 이름을 전할 때 고난의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옵소서. 말씀에 주신 것처럼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하게 하시고, 주님의 이름을 전할 때마다 성령의 사람들을 만나게 하시며 아름다운 동역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사랑의 주님, 오늘도 예배하는 자들의 심령에 함께 하시고, 구하는 바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할 수 있는 믿음의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주님을 따름으로 나타날 고난을 두려워하여, 나태한 길로 빠져가는 무력한 자가 되지 않게 하시고, 주께서 주시는 평강 중에 담대함으로 살아가며 주의 이름을 말하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회심의 정로에 선 사람 김창운 담임목사 2017.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