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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심의 정로에 선 사람 (2017.10.08)
설교자     김창운 담임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사도행전 9장 1-9절
 
 
본문 내용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Content

행 9:1-8 회심의 정로에 선 사람


사도행전은 누가가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예루살렘에 있던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임하셨고,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이방을 향하여 일하시는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도행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한민족, 또 우리 교우 여러분들에게 임하시는 역사를 만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인물과 사건들이 있습니다. 지난 여덟 장의 이야기들 속에 사도들과 스데반과 빌립 집사님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성령 강림과 초대교회 부흥의 역사를 이루었다면, 스데반과 빌립 두 분은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흩어진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스데반과 빌립 두 분이 이방 선교를 위한 개척자적 준비를 했다면, 9장부터는 이방을 향한 본격적인 선교의 주인공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다소 출신 사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이 사울의 회심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사건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사도행전은 세 번이나 이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9장과 22장, 26장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 회심 사건이 어떻게 일어나게 된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役事)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울을 회심시키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였습니다. 그것을 세 단계로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 이 회심은 사울이 예수를 핍박할 때 이루신 사건이었습니다. 사울은 스데반이 순교하는 자리에서 증인들이 옷을 벗어 발 앞에 증거를 남긴(7:8) 그 인물입니다.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하게 여겼고,’ 앞서 사도행전 8:3에 보면 교회를 잔멸하고자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울이 더욱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다고 들려줍니다. 예루살렘에서 그는 예수 믿는 남녀를 죽이려고 체포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이때 예루살렘을 탈출해서 다메섹으로 도망쳤습니다. 당시 이 다메섹에는 약 30-40개의 회당이 있었고,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4-5만명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이 이 다메섹으로 탈주한 것인데, 사울은 이들을 소탕할 음모를 가지고 대제사장에게 재가를 받습니다. 오늘날의 말로 하면 <망명자 소환 집행 명령>이라는 공문을 받고 그 책임자로서 다메섹을 향해 가는것입니다. 그의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누가는 마치 야생동물이 헐떡 거리면서 코를 씨근거리는 모습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행8:3에서 교회를 잔멸한다는 말(뤼마이노마이)이나 9:21절에 다메섹 신자들이 사울을 표현하기를 ‘(교회를) 멸하던 자’라고 할 때 멸한다는 말(포르테오), 모두가 <잔인하고 포악한 짐승이 잔뜩 흥분해서 거칠게 행동하는 모습>을 뜻합니다. 행 26: 11에 보면 사울이 회심한 후에 자신의 당시 상태에 대해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격분, 극도의 분노에 찬 모습입니다. 한 마디로 사나운 들짐승처럼, 격분한 이 사람에게 회심의 의도나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입니다. 그런 그가 회심을 합니다. 돌아섭니다. 변화 됩니다. 깔뱅 목사님은 사울의 회개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처럼 잔인한 늑대가 양으로 변했을 뿐 아니라, 목자의 품성으로 변하였다’고 말입니다. 이 회심의 근원적인 힘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인 것입니다. 그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어리석고 거칠게 분노한 그때 하나님께서 그를 회심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울에게 회심의 동기나 의지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찾아와 회심(悔心)토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 교회사에도 유명한 회심 사건들이 있습니다. 초대 선교사를 지내신 이기풍 목사님은 평양의 깡패였습니다. 당시 선교사로 오셔서 복음을 전하던 마펫 목사님에게 돌을 던져 턱을 깨뜨린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변화되었습니다. 김익두 목사님도 대단한 깡패였습니다. 들짐승처럼 거친 성격과 포악한 행실을 하던 사람들이 변하여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우리 중에도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 주권적 은혜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마음이 상하고 거친 자들, 방황하는 자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 은혜를 온전히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이 회심은 예수님께서 사울을 붙잡으심으로 이루신 사건입니다. 본문은 사울과 그를 호위한 병사들은 다메섹을 향해 가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는 240킬로미터나 되는 긴 거린데 약 일주일이 걸립니다. 그들이 다메섹에 거의 당도한 때가 정오쯤이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26:13)이 사울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이 빛은 너무도 강렬하여 그의 눈을 멀게 합니다. 그 자리에 쓰러졌습니다. 땅에 엎드려졌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그를 부르십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그리고는 누구시냐고 묻는 사울에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사울에게 주님의 제자들을 박해하는 것이 바로 주님을 박해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사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일이 그에게 벌어진 것입니다. 같이 가던 사람들은 말을 못하고 서 있습니다. 소리만 듣고 아무 것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행 22:9에 보면,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고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그를 압도하신 것입니다. 이 의미는 큽니다. 주님께서 친히 이 들짐승같이 거친 사람을 붙잡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꿈이 아닙니다. 주관적인 환상이 아닙니다. 부활하시고 영광을 받으신 주님께서 직접 사울을 찾아오신 객관적 출현 사건이었습니다. 그가 본 빛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이었습니다. 그가 들은 음성은 그리스도의 음성이었습니다. 자만심과 자신감, 자기 정의감에 빠져 거친 분노의 숨결을 뿜으며 그리스도께 대항하던 이 사람을 주님께서 도리어 포로처럼 붙잡으신 것입니다. 포로 맞습니다. 포로가 무엇입니까? 묶이고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께 붙잡혀 다메섹으로 끌려가는 꼴이 되었습니다. 다메섹의 성도를 체포하겠다고 호기 당당하게 가던 그가 도리어 예수께 체포되어 다메섹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바로 이 형상이 성도들의 인생이라면 믿어 지시겠습니까? 성도란 주님께 붙잡힌 인생인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고 악하고 부족합니다. 지금도 인지를 못하고 인정을 못할지 모르지만, 성도가 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은혜가 사로 잡으셨기에 이루어진 사건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은혜가 강제적인 것도 갑작스런 것이란 것이란 말은 아닙니다. 사울에게 그러했듯이 주님의 주권적 은혜는 억지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사울을 겸손하게 하셔서 땅에 엎드러지도록 하셨지만, 사울의 인격을 침해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사울을 로봇 같은 꼭두각시로 전락시키신 것도 아니었고, 최면을 건 것처럼 자신의 인격과 무관한 행동을 하도록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사울의 언어를 빼앗아 대답할 수 없을 만큼이나 그를 압도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5절에 보면, 그는 주님을 향하여 질문을 합니다. ‘주여 뉘시니이까?’ 그리고 행 22:10에 보면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충격적인 이 상황에서 사울은 그의 이성과 인격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입술로 주님께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의미 깊은 질문을 한 말씀 하십니다.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의 제자들을 박해하는 것이 주님을 박해하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사울이 행하는 이 어리석고 악한 행실을 스스로 깨닫게 하시고자, 사랑의 음성으로 그의 이성과 양심에 호소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사울과 같은 초월적 체험을 갖고 싶어 합니다. 순식간에 삽시간에 변화되는 것이 멋있게 보입니다. 교회 역사에 그러한 일들이 많이 있었고, 많은 성도와 목회자들이 그런 인격적 체험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날 그 체험들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기도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 체험을 통해서입니다. 오늘 주님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예배에서 선포되는 말씀 속에서 우리를 만나십니다. 우리를 부르십니다. 주권적 은혜로 우리에게 찾아와 붙드시는 것입니다. 다소 출신의 이 광포한 고집통을 만나주신 것처럼, 오늘도 우리와 같이 교만하고 반항적이며 어리석고 악한 자를 만나주시고 또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이후에 빌립보서를 쓰면서 변화된 자 바울은 그때의 그 일이 “주님께 붙잡힌 바 된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빌 3:12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주께서 나를 사로 잡으셨으므로, 나는 그때 붙잡힌 바 된 그것을 기억하며 끊임없이 끊임없이 그 붙잡힘을 붙들고 주님을 따라가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주권적 은혜 앞에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그 은혜에 압도된 존재요, 사울과 같이 주님께 붙잡힌 된 사람인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를 향해 찾아오시고 우리 이름 부르시는 주님의 주권적 은혜 앞에 사울처럼 엎드러짐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 엎드러짐 속에 참된 자유와 참된 행복이 있습니다. 주님의 주권적 은혜 안에 있음으로 인해, 여러분, 어깨에 힘을 빼세요. 내려놓으세요.. 잊어버리세요.. 털어버리세요. 놔버리세요. 보내버리세요. 주님의 주권적 은혜 앞에 체포되고 압도되고 붙잡힌 바 되어 주님의 영이 여러분 위에서 살아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주님께 붙잡혀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사흘 동안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바로 그 식음을 전폐한 사흘간 그는 주님을 깊이 만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셋째, 이 회심 후 사울은 두고두고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고백합니다. 갈 1:15-16의 말씀을 보십시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아들을 내게 보여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심’으로 이룬 일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은혜는 우리를 기뻐하심에 있습니다. 사울은 이후 로마서 12:2에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 하나님의 뜻을 규명하여 말하기를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하고 위대하신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뜻은 온 세상을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말입니다. 사울에게 그렇게 임하신 주님의 뜻은 우리를 향하여서도 조금도 다르거나, 모자람이 없습니다. 사울에게 주었던 은혜보다 저급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보다 더 한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며 우리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사울은 우리처럼 신약성경도 못보았던 사람입니다)
행 26:14에서 사울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마치 당신을 소를 길들이는 농부로 비유하십니다. 그리고 사울을 마치 거칠고 고집이 센 황소로 비유하셨습니다. 길들여지지 않은 황소는 뒷발질을 합니다. 주인이고 뭐고 없습니다.  예수님을 박해하고 거부하는 일이 가시 돋은 채찍을 뒷발질 하듯이 도리어 자신의 심령에 고통을 주는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박해할 때 사실 사울은 내면에 숱한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협잡꾼으로 여기고 거부하고, 그를 믿는 도당들을 잔멸하면 할수록 그의 심령 속에서 솟아오르는 의문들이 있었습니다. 대체 이들은 왜 이런가? 하는 의문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은 이 사울이 예수님과 거의 동년배로서 같은 시기에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고 서로 마주치기도 했으며,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치는 것들도 들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는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부활 예수에 대한 증인들이 끊임없이 나올 때마다 그의 마음에는 혼란이 옵니다. 즉 그는 이 혼란의 심령 중에 예수라는 분을 유대 바리새적 관념으로 억누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율법만을 숭상하는 유대신앙을 지니고 있지만 온전한 평강을 누리지 못하는 내면적 혼란이 있었습니다. 롬 7:7-8에 의하면 그가 이 탐심으로 괴로와하는 양심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율법이 가르쳐주는 탐심이라는 죄의 문제로 그는 겉은 뻣뻣하고 자신 있어 보이지만, 사실 내면적으로 평안을 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도 없었고, 그로 인해 내적 혼란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바로 그러한 사울의 마음을 알고 계셨고, 그를 불러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사울이 회심 사건을 갑작스런 일이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사울의 회심은 단번에 즉각적 사건이 아니라, 거친 황소를 서서히 길들여가신 주님의 주권적 은혜의 역사였습니다. 주님께서 사울로 하여금 <회심을 향한 정로>로 향해 오도록 주권적 은혜로 인도해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10에서 말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어디를 가고 있습니까? 어디를 향하여 서 있습니까? 우리가 믿음을 얻기를 바라거나, 영적 성숙을 바란다 할 때, 우리는 요행을 바라는 세태의 풍조를 따르는 경향이 있을지 모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주님을 만나 즉각적으로 변화되는 기적적 체험 말입니다. 마치 로봇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사로 잡고 꼭두각시 삼아 엄청난 일을 이루시기를 바라는 심리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을 기뻐하십니다. 그 기뻐하시는 뜻 안에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날마다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의 사건, 절대적 은혜의 사건에 압도되고 엎드러지는 삶을 원하고 계십니다. 거기에 자유가 있습니다. 참된 행복이 거기에 있습니다. 세상을 이길 힘이 거기에 있습니다. 참된 평화가 거기에 있습니다. 말씀 속에서, 절대 주권적 그 은혜 속에서 성령의 역사가 살아납니다. 그리고 그 은혜 속에서 우리는 사울처럼 점진적으로 변화되고 회심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은혜 안에 있음을 누리며 <회심의 정로에 서는 인생>으로의 자기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은혜를 구하는 기도] 사랑의 하나님, 오늘도 저희는 연약하고 부족합니다. 사울처럼 뻣뻣하고 거친 모습도 있고, 바른 믿음의 선택을 하지 못하고 넘어지는 양심으로 괴로워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희를 향하여 사울처럼 찾아오시며 부르시는 주권적 은혜를 만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인생의 발걸음이 하루하루 주님을 닮아가는 믿음의 경로를 가게 하시고, 하루 하루 회심 또 회심의 정로(正 路)를 가는 복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인생 연륜이 깊어질수록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하시옵고, 그 열매들로 세상을 다스리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랑의 주님, 오늘 저희를 찾아오시는 주님의 주권적 은혜를 봅니다.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향해 물으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게 하시고, 깊은 만남들이 더하도록 교회에 기름부어 주시옵소서. 혹 우리 중 사울처럼 사흘 동안의 식음을 전폐한 어둠의 시간을 걷는 이들에게는 어둠을 시간을 뚫고 빛을 되찾는 은혜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에디오피아를 향한 복음 김창운 담임목사 2017.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