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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박해 속에 피어난 큰 기쁨 (2017.09.17)
설교자     김창운 담임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사도행전 8장 1-8절
 
 
본문 내용
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6.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7.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8.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Content

                      행 8:1-8 큰 박해에서 이루신 큰 기쁨
허드슨 테일러라는 이름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OMF(Overseas Missionary Fellowship)동아시아국제선교회라는 선교단체의 전신인 <중국내지선교회>를 창설한 선교사입니다. 22세의 나이에 중국선교에 헌신을 하여 51년 동안 중국에 영혼들을 위해 선교를 하고 73세의 나이에 중국에서 일생을 마친 분입니다. 하나님께 헌신한 분이었으니 하나님께서 늘 돌보셨고 지켜주셨을 것입니다. 그 분의 일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그 분의 선교를 위해 얼마나 많은 기적적인 도우심과 돌보심이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선교지에서 들어간지 13년만에 사랑하는 딸을 잃었고 그 후 3년만에 아들 둘을 연이어 잃습니다. 그로부터 13후에는 사랑하는 아내 마저 하늘 나라로 떠나 보냅니다. 1900년 5월에 중국을 휩쓴 의화단 사건으로 그가 이끌던 선교사 135명과 53명의 선교사 자녀들이 살해되었습니다. 1949년에는 공산주의 혁명으로 637명의 선교사들이 중국을 떠나야 했습니다. 대단히 큰 불행이었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구원의 은총을 주셨고 또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지켜주심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노라면 때때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는 절망적인 질문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시는 계획이 있는 줄은 알겠는데,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그 그림을 미리 다 보고 싶어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모든 인생이 그런 고뇌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이 들려주는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스데반이라는 위대한 성도가 돌에 맞아 죽는 참혹한 일이 벌어집니다. 이 일은 큰 사건입니다. 성령충만의 역사, 놀라운 기적들, 귀신이 쫓겨나가고 병든 사람들이 치유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수만 명의 성도들이 구원의 백성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들이 모여서는 하나님께 예배하며 성령충만을 누렸고, 평일에는 날마다 집집마다 모여서 떡을 떼고 교제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교회의 전형을 이룬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교회를 놀라고 두렵게 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게 웬 일입니까? 예수 잘 믿은 결과로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누굽니까?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말씀도 잘 전하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이적과 기사를 행하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던 대표적 성도가 처참하게 돌에 맞아 죽은 것입니다.
8장의 말씀은 사울이라는 이름이 한 발짝 앞으로 다가옵니다.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저 이상한 도당에 속한 사기꾼의 죽음을 찬성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울에게 저 예수 도당은 ‘저주에 받아서 나무에 달려 죽은 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살려주어 주와 메시야가 되게 하셨다’고 선전하는 사기꾼들이었습니다. 스데반은 그렇게 잠들었고, 사울이 부각되어오는 이 절묘한 교차 장면 속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오늘 말씀 속에서 그것을 생각해봅시다.
첫째, 큰 박해가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1절 하반절과 2절을 읽습니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행 8:1하-2)
예루살렘 교회에 박해가 있었습니다. 그 박해는 스데반이 죽는 날에 시작되었습니다. 마치 폭풍우와도 같이 사나운 박해가 예루살렘 교회를 향해 공격합니다. 2절에 보면 스데반 집사님이 참혹한 죽음을 맞았을 때 경건한 사람들이 장사를 지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크게 울었다”고 했습니다. 유대 율법 해석서인 <미쉬나>에 의하면, 유대 율법은 사람이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처형당한 사람을 위해 장례를 치루어 주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위해서 애곡하는 일은 금지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의 죽음에 대해 장례까지는 모르지만, 크게 애곡하였다는 말은 상당히 큰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즉 스데반과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유대인 성도들이 죽음도 불사한 사랑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초대교회 성도들의 사랑은 뜨겁고 애틋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스데반을 애곡하며 장사한 사람들에 반하여, 3절에서는 이 사울이라는 유대인이 교회를 잔멸했다고 했습니다. 여기 잔멸했다는 말은 보통, 온전한 몸을 맹수가 달려들어 물어뜯고 찢어 놓는 것을 말합니다. 그야말로 사울은 야수와도 같이 병적으로 집착하며 교회를 찢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집집마다 수색을 해서 남자든 여자든 끌어다가 옥에 넘기는 일을 맡아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하고, 젊은 혈기가 왜곡된 사상을 만나 휘둘러대는 칼은 얼마나 위험한 것입니까? 우리 역사에서도 625 전쟁 때 남한을 침범한 북쪽 괴뢰군은 동네에서 배움 없고 하릴없던 청년의 팔에 완장을 끼워 주었습니다. <인민 해방>이라는 구호를 심어주고, 그를 부추겨 동네를 헤집으며 온갖 못된 짓에 총대를 매는 앞잡이로 세웠습니다. 불과 얼마 후 국군이 그 땅을 수복했을 때 이 사람은 얼마나 부끄러운 말로를 겪게 되었겠습니까? 지금 사울은 마치 사탄에 씌운 것처럼 교회를 잔멸하고 있습니다. 후일 그는 두고두고 이 일들을 괴로와 하며 참회하게 됩니다.
후일 선교사로 헌신한 후에 사도행전 22장에 보면,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켰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행 22::20).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는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고전 15:9)고도 부끄러운 고백을 합니다. 제자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3)고 참회하는 심정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말씀을 늘 가까이 하여야 하고 진리를 분별하기 위해 애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에는 ‘이렇다더라 저렇다더라’ 하는 그릇된 억측의 말들이 난무합니다. 인터넷이나 SNS 사회통신망을 통해서 책임 없는 말들을 퍼뜨리고는 ‘아니면 말고’ 하는 식의 행동들의 뒤 편에는 그로 인해 큰 울음 소리가 있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허위와 무책임과 비방으로 난무하는 시대와 사조 속에서 성령께서 여러분을 지키셔서 분별의 영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이 박해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이 성도들로 하여금 흩어지게 했습니다. 스데반집사님의 죽음으로 인해 예루살렘의 성도들 사이에는 큰 울음이 있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 후에 이어지는 ‘잔멸’의 행위로 인해 성도들의 큰 울음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급기야는 그 박해와 울음 속에서 흩어지게 된 것을 성경은 기록합니다. 1절 하반절의 말씀처럼,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졌다”고 했습니다.
누가의 필체가 아름답고 매력적인 면이 여기 있습니다. <유대와 사마리아와 모든 땅으로 흩어졌다>고 했습니다. 행 1:8에 요절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위임하신 명령의 말씀을 기억나게 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바로 유대, 사마리아, 땅들을 향해 나가고 있다는 말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위임령이 이 박해의 결과로 이행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흩어졌습니다. 그들을 <디아스포라>라고 했습니다. 디아스포라의 유래는 바벨론 포로기로부터 시작됩니다. 바벨론이 침략하여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포로로 수많은 사람들을 끌고 갈 때 첫번 디아스포라가 있었습니다. 이후 헬라의 침략, 로마의 압제로 인해서도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유대교를 가지고 흩어졌습니다. 흩어진 곳에서 회당을 만들어 그 곳에서 모였습니다. 그러나 그들만의 종교, 유대의 종교로 모였습니다. 이제 흩어지는 사람들은 유대인들 중에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입니다. 그야말로 “새 예루살렘”의 디아스포라, 만민을 향해 나가는 디아스포라로 분산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61장 9절은 이렇게 기록됩니다.
그들의 자손을 뭇 나라 가운데에, 그들의 후손을 만민 가운데에 알리리니 무릇 이를 보는 자가 그들은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라 인정하리라 (사 61:9)
뭇 나라를 향해, 만민을 향해 흩어져 나가는 예언이 이 박해 때에 성도들을 통해 성취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자랑스런 것이 있습니다. 중국인들은 세계로 흩어지면 중국집을 만들고 절을 세웁니다. 일본인들은 흩어지면 비즈니스 사업체들을 세웁니다. 우리 한국인들이 가는 곳은 어디서나 교회를 세웁니다. 그 곳에서 모여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양합니다. 저는 네팔 카투만두의 한 켠에 모인 코이카 NGO사람들과 사업하면서 선교하는 분들의 뜨거운 예배와 찬양을 잊을 수 없습니다. 몽골 울란바타르에서 사방으로 흩어져 교회를 세워 예배를 드리며 북한선교까지 준비해가는 이들의 예배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에서 러시아에서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모든 세계에 우리 한국인들이 가는 곳에는 교회가 세워지고 예배가 이루어집니다. 참으로 자랑스런 일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전한 말씀은 예언과도 같았습니다. 이제 율법과 성전의 시대는 갔고,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가 이제 예루살렘을 떠나 사방으로 흩어져 가는 것입니다. 경건한 성도들이 큰 울음을 울며 스데반을 장사할 때, 그들은 이미 구약 율법의 시대를 벗어나 새로운 신약 시대의 새 역사를 열어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남아서 전세계로 흩어져가는 교회들의 본부 역할을 해야 합니다. 사도들로부터 말씀을 듣고 배운 예수의 새 제자들은 이제 흩어져 갑니다.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것이 세 번째 주목할 핵심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흩어지는 사람들을 통해서 복음 말씀을 전하고 계셨습니다. 4절 말씀을 읽습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행 8:4). 스데반의 순교가 박해를 일으키고, 그 박해가 성도들로 하여금 큰 울음 속에 흩어지게 했다면, 이 흩어짐은 복음의 말씀이 전파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었습니다. 흩어져가는 이 사람들은 도망을 하면서 몸을 숨겼거나, 신분을 감추며 침묵을 지켰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두루 다니면서 복음의 말씀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지금까지는 말씀을 전하는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사도들이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금지령과 폭력과 위협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예수 부활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사도들이 하였지만, 스데반 집사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제부터는 복음 말씀을 전하는 주도적 인물들이 바로 새로운 예수의 제자들, 성도들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분 중에 빌립 집사님이 있습니다. 이 분이 사마리아로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사실 사마리아는 그렇게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때부터 약 천년 전, 이스라엘 왕국은 르호보암-여로보암 시대부터 유대와 북이스라엘로 갈라져 지냈습니다. 수요기도회 시간에 <요나와 나훔의 스토리>를 들으신 분은 잘 알겠지만, 북왕국 이스라엘이 주전 722년 앗수르에 멸망하면서 이 분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집니다. 앗수르가 북왕국을 침략하고 상류층에 쓸만한 사람들은 다 끌고 가고 앗수르 사람들을 사마리아에 이주시켰습니다. 북쪽 땅 자체가 이방인의 땅이 된 것입니다. 더욱이 강제 혼인정책으로 이 민족을 혼혈족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자랑하던 열두 지파 중에 북쪽에 속했던 열 지파가 그렇게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선민 이스라엘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완전히 상실한 것입니다. 그래서 남쪽 유대인들에게는 사마리아인이라고 이방족과 같은 대우를 받습니다. 마침내 주전 4세기에 결정적으로 이 사마리아의 사람들이 자신들만의 성전을 세웁니다. 예루살렘 성전만 성전이냐, 그에 대항하면서 그리심산에 성전을 세우게 되면서 유대인들로부터 극심하게 분리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요한복음 4장에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것은 대단히 혁명적인 일이었습니다. 바로 그 곳에 빌립이 간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성령의 역사입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기억나십니까?
사실은 사마리아인들도 권력자들의 정책으로 인해 남쪽 유대 사람들과 분리 되었지만, 그들도 성경을 믿었고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25절에 보면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의 놀라운 고백이 있습니다.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요 4:25). 그들도 그리스도(메시야)를 믿고 갈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곳에 빌립 집사님이 들어가 복음을 전합니다. 말씀을 전할 때 표적이 나타나고 더러운 귀신들이 나가고 중풍병자와 못걷는 자들이 나았다고 했습니다. 말씀이 사도들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닌 것처럼, 이적과 치유의 역사도 사도들에게만 제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을 들고 들어간 빌립을 통해 말씀의 능력이 이렇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자 무리가 그 말을 열심히 듣고 한 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랐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기록합니다. 8절입니다.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행 8:8)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다 알 수 없는 일을 하십니다. 스데반이 죽던 날, 그 죽음 속에서 하나님께서 저 사마리아 성에 큰 기쁨을 이루실 줄을 알았겠습니까? 지금 저 믿음의 제자들을 잔멸하고 있는 사울이 알고 있었겠습니까? 사도들 조차도 이 일을 미리 다 알고 있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합시다. “하나님이 아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이 되고 위로와 평강의 말씀이지 않습니까?
우리 민족이 가진 동란의 역사는 슬픕니다. 참으로 아픕니다. 특히 북한에서 예수를 믿으며 열심히 살아오던 성도들이 공산당이 그 땅을 점거하면서 박해가 일어날 때 그야말로 가진 것 다 뺏기고 큰 울음을 울며 남쪽으로 피난을 합니다. 지금 95세가 되신 한 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이 분이 그렇게 이북에서 모든 걸 뺏기고 남으로 걷고 걸어 피난을 하는데 연명은 어찌 했겠습니까? 주님께 기도하면서 길을 걷다가 지쳐 어느 집 처마 밑에 앉아 웅크리고 있으면, 이남에 사는 착한 사람들이 이리 들어오라 하고. 삶은 감자라도 내주고, 어떤 집에는 수제비도 나눠 함께 먹었다고 합니다. 그때 이 장로님이 하도 고마워 눈물 흘리면서 이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지요. “하나님, 이 집에 복을 주시고 이 은혜를 하나님께서 크게 갚아주십시오.” 나중에 전쟁이 끝나고 조금 여유가 있어 찾아가보면, 그 분들이 그때 예수를 영접하고 교회 권사님, 장로님 되셨고, 자녀들 목회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서로 다 어려운 처지였지만 그렇게 사랑을 나누며 살던 시절, 그 짧은 기도 몇 마디가 이 사람들의 귓전에 박히고, 성령님이 그들을 움직여 그들 속에 믿음이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남한, 대한민국의 교회들을 이룬 것 아니었습니까?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의 이야기지만, 그때가 행복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건, 가을 탓도 아니요 제가 나이든 탓은 더더욱 아닐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그렇게 뜨겁게 나타나는 것, 말씀이 참으로 능력을 지니고 힘있게 전파되는 그보다 더 큰 행복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민족 속에서도 큰 박해 속에서 큰 기쁨을 이루셨습니다. 서두에 말씀 드린 허드슨 테일러의 선교회가 1949년 공산주의 혁명으로 인해 637명의 선교사들이 중국을 떠나야 했을 때도 이 일은 큰 박해였습니다. 당시 모두가 큰 위기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 이 단체는 동아시아 선교를 위해 동남아와 일본에 286명이 재정비 되었습니다. 또한 중국에 그리스도인들은 박해 속에도 도리어 늘어나기 시작하여 선교사들이 떠났을 때보다 3-4십배의 부흥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들려주신 일은 이렇듯 기독교 역사 속에 무수히 나타납니다. 박해는 결코 교회를 파괴하지 못합니다. 도리어 박해의 시간, 큰 고난의 시간 가운데 하나님께서 일하시며 큰 기쁨의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옛 얘기만 하면서 마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오늘 믿음 안에 살아가는 이들은 내게 주신 고통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으로 옮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신다면, 그 곳으로 흩으시며 말씀을 전하게 하시는 주님의 뜻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의 소원이 있을 때는 그것을 통하여 나를 십자가로 가까이 부르시는 주님의 손길을 볼 수 있어야 하며, 주님께서 오늘 내 생을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시는 뜻을 기도하며 발견해야 합니다. 아무 의미도 없는 인생이란 없고, 어떤 의미도 없는 고난이란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 주신 은총 안에 살아가는 한 말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에게 도전하는 한 선배 신앙인의 말에도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축복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반면, 수없이 많은 이들이 아직 그 축복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 밴스 해브너(Vance Havner)
이 말에 가슴이 뜨거워지십니까? 이 땅에도 4천만 인구는 아직 복음을 듣지 못했거나 믿지 못합니다. 세계에도 50억의 인구는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예배를 모릅니다. 잠자고 있는 우리를 흔들어 깨우시고,  아픔의 시간을 통해 주님의 뜻을 찾게 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이,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하시고 우리의 발길을 말씀의 발길로 주장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은혜를 구하는 기도] 사랑의 주님, 오늘 나의 믿음이 기적이요 감사입니다. 스데반집사님, 빌립집사님, 그리고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을 통해 오늘 제게 이르렀습니다. 성령께서 이 땅에 이루신 그 모든 역사(役事)를 통하여 구원의 백성, 하나님의 돌보심 안에 살아가는 자녀 되게 하셨음을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이제 저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뜻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제 인생의 주인 되신 예수님께서 제 생의 한 가운데 찾아오셔서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주옵소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영혼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시고, 제가 일하는 자리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주시옵소서.
 
사랑의 주님, 오늘도 우리의 삶이 기적이요 우리의 믿음이 감사입니다. 선하신 주님의 손길이 여기까지 도우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말씀 속에서 저희의 영혼을 깨워주시고, 저 돌을 든 것처럼 도전해오는 세상의 풍조와 박해 속에서 스데반처럼 하늘을 바라보는 평강과 말씀을 전하는 담대함이 있게 하옵소서. 낯선 땅 사마리아에 이르러 복음을 전하던 빌립처럼 말씀을 전할 때 능력이 나타나고 많은 이들이 주의 말씀을 따르는 은혜도 허락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순수한 성도, 예수님의 제자됨으로 한걸음 나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도보다 설교를 잘 한 사람 김창운 담임목사 2017.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