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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으로 충만하여 (2017.09.03)
설교자     김창운 담임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사도행전 6장 8절-7장 4절
 
 
본문 내용
8.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9.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11.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12.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13.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14.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1. 대제사장이 이르되 이것이 사실이냐
2.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3.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Content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으로 충만하여


사도행전은 성령님의 이야기입니다. 또한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성령께서 강림하시고 사도들과 그 제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벌어지는 이야기들입니다.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초대교회가 부흥하였고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났습니다(5:12). 믿는 사람들이 모이고 예배하고 기도하고 은혜로 충만하자, 치유가 나타나고 말씀이 힘있게 전파되었습니다. 외부의 핍박도 있었습니다. 내부인 중의 타락한 성도의 위선적 행위도 발견되었습니다. 교회가 커가면서 갈등도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성령께서 이기게 하셨습니다. 교회의 일꾼을 세워 소명에 따라 사역을 위임하며 조직을 정비하게 하셨습니다. 말씀이 왕성하여 갈 때 제자의 수가 더 많아지고 유대교 제사장들도 허다하게 예수님의 복음으로 들어왔습니다.
이때의 모든 일들은 성령님의 일이었습니다. 또한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일이었습니다. 성령님이 일하시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령님을 사모하고 성령에 충만한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꿈꾸고 소망하는 초대교회는 성령님께 민감하고 성령님의 충만을 사모하는 이들 속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사건들이 나타났습니다. 어마어마하게 나타났습니다. 바로 거기에 스데반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이 스데반이라는 분은 성경에 가장 처음 기록된 순교자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은 본래 헬라말로 <스테파노스>입니다. 여기에서 이 분은 초대교회에서 두 그룹 중 히브리파 유대인이 아니라, 헬라파 유대인 출신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름 뜻은 ‘면류관/왕관’이란 뜻입니다. 하늘의 상급인 의의 면류관, 썩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생각한다면 이 분의 생애에 걸맞은 이름일 것입니다. 필시 그의 이름을 지어준 부모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늘의 상을 사모하는 신실한 분일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성경에는 이미 이 분에 대해 칭송이 자자합니다. 행 6:3에 보면, 스데반을 비롯한 일곱 명의 일꾼들은 사역자로 선택되기 전에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으로 인정받은 이들이었습니다. 6:5에서 스데반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는 특별한 인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행 6:8에 스데반이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였다고 전해줍니다. 이 분은 사도가 아니었습니다. 교회에 장로 혹은 권사, 집사님으로 안수를 받은 일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마치 사도들처럼 기사와 표적을 행했다고 했습니다. (전례상 집사님으로 호칭합니다) 성령의 역사와 사건은 목회자, 성직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성경은 분명히 보여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스데반이 사도들에게 안수를 받았으므로 그런 일을 이루었다고 했습니다만, 스데반과 나머지 여섯 일꾼들은 안수를 받기 전에 이미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행 6:10에서도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사람이었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의 충만이 임하자 그에게 신비롭고 기적적인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성령의 기사와 표적은 성도들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한 사람 모두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은혜 안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기적과 표적이 나타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충만한 제자를 통해 어떤 일이 나타나는가가 중요합니다. 그것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주보에 메모도 하시면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첫째, 성령께서는 성령의 사람으로 하여금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일’은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때때로 우리가 복음 전도를 해야 하겠다 결심을 하고, 또 마음으로 전도를 해야 할 줄을 알면서도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령님의 역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을 사모하지 않고 내 인생에 성령님의 일하심을 진정으로 간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을 입었습니다.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고 선물로 오신 성령님이 그 마음 속에 있지만, 성령님의 사건이 그 삶에 복음 전파로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을 축복하기는, 오늘로부터 말씀의 역사가 여러분에게 나타나, 여러분 속에 살아계신 성령님이 움추려 계신 것이 아니라, 삶에서 힘있게 말씀으로 역사하심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러한 말씀 전파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였습니다.  9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행6:9)
스데반이 복음을 전한 것은 자유민들의 회당에서였습니다. 이 말은 곧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문화의 자리에서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자유민들이란 로마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주전 63년에 로마의 폼페이우스 황제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유대인들을 끌고 갔습니다. 이렇게 끌려간 사람들은 대개 로마의 노예로 끌려간 것입니다. 그 중에는 주인들이 나중에 놓아주어서 자유인이 된 사람들도 있었고, 혹은 로마인의 시민권을 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들이 좀 여유가 생기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사는데, 본토에 있던 예루살렘 사람들과는 어울리기가 어렵습니다. 언어도 문화도 다르기 때문에 그들끼리 회당을 세워서 거기서 모였습니다. 스데반은 바로 그 회당에 찾아간 것입니다.
자유민들도 외국 헬라문화 출신입니다. 스데반도 헬라파 유대인 출신입니다. 소아시아에 속한 구레네에서 온 사람들, 저 북부 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사람들, 길리기아에서 온 사람들,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 외국에 끌려가 살다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 모두 그리웠던 고국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본토의 사람들과는 어울릴 수 없는 딱한 사람들입니다. 헬라파 유대인인 스데반도 바로 그들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기에, 그들의 딱한 사정을 알기에, 무엇보다 성령으로 충만하자, 성령님께 이끌려서 그 곳으로 간 것입니다.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논쟁이 벌어졌다고 했습니다.
둘째, 말씀을 전하는 일에는 방해가 있습니다. 회당에 있던 자유민들은 아직 예수를 알지 못했습니다. 유대주의 신앙만 알고 있어서, 모세가 전한 율법 신앙과 예루살렘 성전을 우상시 하는 성전 신앙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논쟁이 붙었습니다. 전도하는 일/ 말씀을 전하는 일에는 이런 공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부흥할 때 세 번에 걸친 사탄의 공격이 있었듯이, 말씀을 전하는 일에는 대적의 공격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일꾼들과 사역자들을 위해 중보하며 기도해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새벽제단의 기도하는 분들이나, 특히 많은 권사님들이 교회와 여러분들을 위해 중보로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말씀의 삶을 살아가고, 성령님의 역사를 전하는 일에 맞닥뜨리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일에 훼방이 있고, 교회를 섬기는 여러 사역들마다 대적의 공격이 있어서 중보기도가 필요하고, 성령 충만이 필요한 것입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이런 방해와 분쟁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아예 말씀을 전하는 일을 포기합니다. 그럴싸한 명분을 가지고 “땅끝까지 주님의 증인 되라” 하신 명령을 거부합니다. 거부하는 만큼 성령님의 역사와 충만함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성에 머문 성령님으로만 만족하려고 합니다. 10절을 다 함께 읽습니다.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스데반이 성령충만으로 말할 때 회당에서 도전하는 논쟁자들이 감히 이길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고로 세번째는 성령께서 말씀을 전하는 자를 이기게 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세상을 이기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이기게 하십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성령 충만함으로 이 논쟁에서 승리했다고 했습니다. 회당의 사람들이 예수의 복음을 공격할 때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였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21:12-15을 읽겠습니다.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 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 가려니와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궁리하지 않도록 명심하라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성령의 사람은 말씀을 전하려 할 때 찾아오는 방해를 이겨내야 합니다. 아니, 성령께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말씀을 전할 때 핍박과 도전을 만나면 주님의 영이 지혜를 주시고 답할 말씀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은혜와 권능이> 충만함으로써 말입니다. 이어지는 7장에서는 스데반이 성령에 충만하여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담대히 말씀을 전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치 사도행전 5장에서 사도 베드로가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 부활의 말씀을 증거했듯이, 스데반 또한 놀라운 말씀을 전합니다. 성령 충만함의 능력은 위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며 성령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은 이렇게 말씀의 능력이 전파되는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이 회당에 있던 자유민들은 더욱 집요하게 스데반을 공격했습니다. 11-14절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말로 지혜로 능히 당해내지 못하자 억지로 누명을 씌웁니다. 매수를 했습니다. 사람들을 뒤에서 충동질 했습니다. 거짓 증인을 세웠습니다. ‘이 사람이 모세를 모독한다,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악성 루머를 퍼뜨립니다. 거룩한 곳이란 성전을 말합니다. 성전과 율법을 거슬러서 말하고 있다고 마침내는 산헤드린 공회에 고소합니다. ‘신성 모독’ 죄를 저질렀다는 죄목입니다. 심지어, 산헤드린 공회가 가장 민감하게 여기는 나사렛 예수를 들먹이며 ‘나사렛 예수가 성전을 헐라고 했고 율법을 허물려고 했다’는 그 말을 전한다고 고발을 합니다. 여러분, 이 모든 것이 지금도 자행되는 세상의 방법입니다. 진실을 미묘하게 변형시켜서 왜곡합니다. 그것들로 선한 사람을 미혹하고 사회와 공동체를 흔들어 놓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서라면 사탄의 방법을 조금도 개의치 않고 쓰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사탄이 하와에게 찾아와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유혹할 때 뭐라고 합니까?
창 3: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얼마나 무서운 장난입니까? 하나님은 본래 뭐라고 말씀 하신 것이죠?
창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모든 나무를 먹되 하나만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선악과를 크게 보게 만들어버리는 사탄의 책략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 나무를 “모든” 나무로 단어 하나 바꿔서 사람을 속입니다. 그때 여러분, 이런 미혹의 말에 넘어가는 것도 위험한 일입니다. 그렇게 속아넘어가는 이유는 말씀을 분명하게 붙잡지 않기 때문입니다. 뱀의 유혹을 받은 하와가 대답한 말을 읽어봅시다.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창 3:3)
본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반드시 죽으리라’ 한 것을 ‘죽을까 하노라’로 바꿉니다. 미혹에 넘어가는 전형적인 인간의 모습입니다. 진리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명명백백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을 때 이런 허무맹랑한 일에도 미혹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때 사탄은 쐐기를 박듯이 말합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먹어라!”
진리의 말씀은 분명하게 기억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이 성전을 헐라, 삼일 만에 다시 세우리라” 하신 말씀을 통해서 두 가지, “부활의 사건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알리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어서, 이 사람들은 성전을 헐겠다느니 율법을 고치겠다는 말로 신성 모독했다는 죄목을 씌워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갖은 방법들을 동원하여 공격해 올 때 스데반은 큰 위기에 처한 것 같습니다. 지금 스데반은 산헤드린 공회라는 서슬 시퍼런 법정에 서 있습니다. 큰 권력과 왜곡된 권모술수와 공격적인 자유민 유대주의자들이 그를 에워쌌기 때문입니다. 그때 스데반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행 6: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이렇게 승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승리의 모습은 그 분의 얼굴에 나타납니다.
결론적으로, 성령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천사의 얼굴을 주십니다. 그들은 모두 돌을 들어 스데반을 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고 기록합니다. 순교의 첫 피가 쏟아질 숨막히는 위기의 시간 앞에서 스데반의 심령은 고요합니다. 그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습니다. 승리자의 얼굴입니다.
이것이 어디에서 오는지 아십니까?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는 스데반의 눈에 비추어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행 7:56에 주님께서 하늘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 것을 봅니다. 주님이 앉지도 못하고 서셔서 스데반을 바라보시는 모습인 것입니다. 주님의 피묻은 십자가의 발자취를 따라 순교의 핏걸음을 가는 이 분을 주님이 바라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아프다면 주님이 더 아프시고, 스데반이 두렵다면 더 두려워 하시며, 스데반이 힘들고 떨린다면, 더 힘들고 떠시고 눈물 흘리시며 안절부절 못하며 서서 응원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그것 하나로 행복합니다. 주님을 보는 그 눈길 하나로 행복합니다. 나의 피를 첫 순교의 피로 쓰신다면, 나를 죽여 교회를 더욱 힘있게 하시고, 이방을 향하여 복음을 세계로 퍼지게 하신다면,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를 따라갈 수 있는 은혜를 얻을 수 있다면, 감히 그것이 은총이어서 감사하고 행복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 주일에 개봉박두합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 열심히 전도하다가 순교하라는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래야 할 결단의 때가 있다면 성령의 사람은 그 일을 능히 할 것입니다. 또 한가지, 천사의 얼굴로 공회 앞에서 있는 스데반의 눈 앞에는 ‘이방에 복음 전파를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해두신 사람이 거기에 있습니다.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던 자유민의 회당에는 길리기아에서 온 사람 그룹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길리기아의 다소 출신에 사울이라는 청년은 그 회당의 그 자리에서부터 산헤드린 공회에 따라와 있습니다. 지금은 사울이 마치 일회용 액스트라처럼 대사가 없지만, 거대한 적개심의 눈동자로 이 스데반을 노려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를 위해, 아니 본래 이방인이었던 저와 여러분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되도록 하시기 위해, 이 극적인 장면을 이루어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 시간을 거쳐 오늘 우리가, 이 벧엘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이 순교자의 죽음이 안타깝습니까?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으면 뭐하느냐, 이렇게 죽고 말 걸 뭐하는 짓이냐고요? 대충 천국가면 되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요?  기억하십시오. 이 스데반의 보여주는 천사의 얼굴빛은 사울의 심령에 박혔습니다. 한 주경학자의 해석에 따르면, 이때의 이 얼굴을 사울이 기억하였고, 그 얼굴빛은 자신이 주님을 만나고 회심하는 경험까지 그의 마음에서 끊임없이 불타고 있었다. 그 사실을 누가에게 들려주어 누가가 이것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오늘 예배의 모습의 천사의 얼굴 같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심으로 더욱 천사의 얼굴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충만히 살아남으로,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심을 인해서 말입니다. <+++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말대로 믿음대로 되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구하는 기도] 은혜로우신 하나님, 주님의 보혈로 저희가 사함을 받고 성령님께서 내주(來住)하신 인생으로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아직 성령님을 선물로 받지 못하였다면 우리의 믿음을 다시 정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고백하오니,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믿습니다. 이제로부터 제 과거의 죄 된 인생을 회개함으로 주님의 정결한 피로 씻어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럼으로 성령님의 임재하심과 충만하심의 복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주님의 말씀을 전하듯이, 성령님이 저의 인생 위에 일하시고 복음의 역사를 이루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랑의 주님, 오늘 말씀 속에서 새로운 깨달음과 믿음의 용기를 더 하여주시기를 구합니다. 세상 속에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성령님의 은혜와 권능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이들이 기도처럼 복음 전파의 역사를 이루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믿음의 삶을 걸어갈 때 어려움이 닥치거나, 세상이 미혹할 때, 성령님 저희에게 더욱 충만하셔서 천사의 얼굴로 빛나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갈등 속에서 성숙케 하시는 성령님 김창운 담임목사 2017.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