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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등 속에서 성숙케 하시는 성령님 (2017.08.27)
설교자     김창운 담임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사도행전 6장 1-7절
 
 
본문 내용

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2.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Content

 

                     행 6_1-7 갈등 속에서 성숙케 하시는 성령님
우리 주님이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 열 두 명의 제자들은 120명의 성도로 부흥했습니다. 성령 강림 사건으로 삼천 명이나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일이 일어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사건 후에 남자만 오천 명으로 성장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어린이 여인까지 하면 2만명으로 추산되는 부흥입니다. 부활하신 예수의 이름이 전파될 때 교회가 크게 부흥하게 된 것입니다. 아름답고 귀한 일입니다. 오늘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하며 예배하는 교회라면 모두가 소망하는 이야기입니다. 키워드는 이 모든 것을 성령님께서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했던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이루신 부흥의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런 부흥하는 교회에 사탄의 도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놀라운 권능의 역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아니,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때 사탄은 더욱 공격적이 됩니다. 자신이 속한 죽음의 영역이 침범되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사탄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부터 끊임없이 하나님 나라를 침범했습니다. 하나님과 아담 사이의 신성한 언약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선악과를 따 먹도록 선동하였습니다. 그 일은 마치 성공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의 의지는 끊임없이 무너진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순간, 사탄은 승리한 줄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인류의 모든 죄를 다 그 어깨에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베드로전서 1:19의 기록처럼, 오직 흠 없고 점 없으신 예수께서 어린 양과 같이 희생의 제물이 되어 죽으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바로 그 희생의 은총을 입고 새 생명을 얻었고, 예배하는 자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존귀한 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승리를 거두셨고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최종적 완성을 조금 유예하셨습니다. 이것을 “이미 이루셨으나, 아직 아니라”(Already, and not yet)는 말로 표현합니다. 우리는 바로 그 <유예된 완성의 시기>에 살아가면서 그 날이 이르기까지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냥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 즉 그 완성의 날에 이르기까지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그 일에 함께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을 통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제자들을 키우시고 그들을 사도로 세워 성령 충만하게 하시고 교회를 세우게 하셨습니다. 그 교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소식, 즉 복음이 전파되게 하셨습니다. 그 복음의 말씀이 힘있게 전파되면서 교회가 점점 부흥해간 것입니다. 이 부흥의 역사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교회를 괴롭히고 넘어뜨리려는 사탄의 공격인 것입니다. 사탄은 사두개인을 중심으로 한 산헤드린 공회라는 외부의 핍박을 통해 두 번이나 교회를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실패했습니다. 교회는 더욱 부흥했습니다. 교회 외부 세력을 동원했는데 실패하자, 이번에는 내부의 사람들을 이용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내부자의 위선을 통해 교회를 타락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이 일도 막으셨습니다. 교회는 두 사람이 죽음 앞에서 거룩한 두려움의 신앙으로 뭉쳐 더욱 부흥해갔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가장 교묘한 방법으로 공격을 했습니다. 교회의 집중력을 떨어뜨리려 한 것입니다. 오늘 대하는 본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문제의 발단은 이렇습니다. 교회가 크게 부흥하면서 불평하는 일이 생겨난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44절 이하와 4장 32절 이하의 기록처럼, 초대교회에서는 너도나도 열심히 헌금을 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구제 활동을 했습니다. 가장 우선 된 대상은 남편을 먼저 떠나 보낸 여인들이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이들 과부라는 호칭을 직분처럼 불렀습니다.) 지금과는 달리 당시 이 여인들은 생계를 꾸려갈 수가 없었습니다. 친척마저 없는 이들은 그야말로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으므로, 사회적으로 돌봄을 주어야 했습니다. “이들의 부르짖음은 하나님께서 신원하신다” 하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출 22:23). 그러므로 교회는 이들을 열심히 도왔습니다. 1절 말씀에, “매일의 구제”라고 했으니 날마다 음식을 나누어준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에는 두 개의 그룹이 있었는데 히브리파 유대인과 헬라파 유대인입니다. 팔레스틴에 본토 출신 히브리파 유대인 성도와 멀리 이방에 살다가 돌아온 헬라 문화에 익숙한 헬라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헬라파 유대인 그룹에 속한 과부들이 이 구제 사역에서 빠진 모양입니다. 그래서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했습니다. 갈등이 일어난 것입니다. 초대교회 안에도 계파가 있었고, 무언가의 혜택에서 형평성을 잃었다는 불평과 원망으로 갈등이 초래된 것을 봅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서 들어야 할 말씀일 것입니다. 갈등이 초대교회부터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큰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어디든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집안에 바람 잘 일 없듯이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갈등의 문제를 통해서 교회의 본질을 흩어놓으려 하는 것이 사탄의 음흉한 계획입니다. 성령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즉 본질을 향해 쏟아야 할 집중력을 분산시키고 주의를 산만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오늘을 사는 우리도 깨어 분별해야 할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을 가고 예배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성령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의 것이 내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면 그 심령은 공허합니다. 은혜가 사라집니다. 다른 말로 교회 가는 재미 없습니다. 이 작은 위기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여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가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성령께서는 이 교회를 갈등 속에서 더욱 성숙하게 이끌어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어떻게 갈등을 해결하셨는지 주의 깊게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교회 공동체의 미래를 위한 선행학습이자, 우리 신앙의 자리에서 중요한 내적 소명에 대한 중대한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첫째, 성령께서는 교회에서 각자의 소명을 일깨우도록 하셨습니다. 2-4 말씀을 다시 한번 읽습니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사도들은 교회에 어떤 해결책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를 함께 나누고자 그들이 가르친 성도들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다> 성령께서는 이때 사도들로 하여금 불평하는 일들이나 분파의 문제나 갈등의 문제를 집중하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더 깊은 차원의 문제를 감지하도록 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부르신 주님의 소명에 집중하고자 했습니다. 즉 말씀과 기도입니다. 말씀 전파와 기도는 마치 한 쌍의 수레 바퀴와도 같습니다. 말씀을 받고, 기도가 이어지지 않으면 결코 말씀의 능력이 열매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역의 본질에 집중하고자 했습니다. 구제라고 하는 복지의 일과 갈등 해결이라는 행정적 일로 인해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사탄의 도전을 꿰뚫어보고, 성령께 이끌려 소명에의 집중력을 회복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들은 지금 이 구제 사역을 목회의 일보다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구제와 복지와 행정적인 일들의 존엄성을 무시한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소명의 문제였습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볼 것은 1절의 <구제>라는 말과 4절에 <사역>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원어성경에는 똑같이 <디아코니아: 섬김, 사역>라는 말을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사역과 봉사의 사역이 동일하게 중요하다는 원리입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소명의 일꾼으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최종적 완성의 날까지 만민을 향한 구원의 손길을 완성하시기 위해 우리를 자녀 삼아, 아버지의 일을 함께 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한가지 더 알아야 할 것은 사람마다 각각 다른 은사를 주셔서 다른 사역을 부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일에 소명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시고 맡겨주신 일에 <사역자>의 심령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명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직업도 사역이 되는 것입니다. 목사가 목회 사역을 하듯이, 운전하는 분은 운전 사역이 되고, 음식점 하는 분은 음식점 사역이 되고, 가르치는 분은 교직 사역이 되고, 논일사역, 밭일사역, 살림사역, 육아 사역, 믿음의 사람들은 맡겨주신 일이 사역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매치기나 노름 같은 것은 사역이라고 말은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사도들로 하여금 우선적인 사역을 하는 일에서 딴대로 주의를 돌릴 권리가 없음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구제의 사역은 구제의 사역, 행정의 일들은 행정의 일로, 모두가 중요하지만 “말씀을 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부름 받은 사람”은 결코 자신의 우선 책임에 대한 집중력을 잃어버려서는 안됨을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모든 제자들에게 전합니다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그리고 성도들의 소명을 더불어 일깨워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성령께서는 주께서 주신 소명을 감당하는 사람을 세우도록 하십니다. 사도들이 전하는 말을 듣고 온 무리가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5-6절을 읽습니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교회의 모든 사람들이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사도들이 전하는 계획의 요지를 이해하고 기쁨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그 일을 할 소명의 사람들을 뽑도록 하십니다. 온 교인들이 일곱 사람의 집사를 뽑았다고 했습니다. 구제 사역과 갈등 해결을 위해 소명이 있는 일꾼을 세운 것입니다. 이 일곱 사람 중에는 스데반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빌립이 있습니다. … 니골라라는 사람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의 공통점 하나가 있습니다. 사도들이 교우들에게 요청했던 일꾼의 자격, 3절에 보면, “지혜와 성령이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경우, 이 구절을 대할 때면 마치 습관처럼, 가슴이 뜨끔해지는 마음들이 있고, 반면에 누군가를 떠올리면서 비웃으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말씀을 통해 우리의 집중력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떠올리려는 그 비본질을 향해 왜곡된 집중력을 지우고, 바로 내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에 대해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분석에 의하면, 현대인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 중에 하나는 말씀을 듣거나 성경을 읽다 보면 자신의 부족함이 드러나고 죄인 된 것 같은 느낌이 싫다는 것입니다. 역시 현대 사조에는 <편한 게 좋고, 좋은 게 좋은 것이다>는 막연한 낭만주의가 서려있습니다. 그만큼 진리에의 접근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 사조 속에 스며있는 사탄의 획책을 깨어 읽어내지 못하면, 우리는 점점 뜨겁게 데워지는 물 속에 늘어져 있는 개구리처럼 어느 순간 다 익어버린채 죽음으로 가는 비극의 시간을 맞을지도 모릅니다.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음의 사람, 천국의 백성이 된 사람을 특별한 호칭으로 부릅니다. <제자>라고 말입니다. 성도는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입니다. 제자가 무엇입니까? 주님을 배우며 그 뒤를 따라가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입고 주님을 따르려고 애쓰는 그 사람이 성도요 제자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는 누구나 사역이라는 소명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사모하고 성령님이 일하시도록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께서 친히 일하시는 교회는 성령의 사람을 세웠고, 사도들은 이 사람들에게 기도하고 안수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사역을 위임하고 사역의 권위를 부여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인생의 소명을 깨달아, 다시금 집중력을 회복하는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셋째 성령께선 말씀이 점점 왕성해가도록 하셨습니다. 7절을 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말씀이 왕성해갔다는 것은 사도들의 근본적 본질을 회복하였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해, 세워진 일꾼들을 포함한 제자들이 사도들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배우고 또한 열심히 전파한 것입니다. 지금 오늘 우리가 만나는 일곱 명의 집사님들과 그 외의 제자들 이야기는 후일에 참으로 멋지게 이어집니다. 7장에서 스데반은 지혜와 성령이 충만하여 대제사장 앞에서도 말씀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8장에는 빌립 집사님이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하고, 에디오피아의 고위직 공무원에게 말씀을 전합니다. 물론 대화 속에서 전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특히 사도행전 11:19-22에는 우리가 깊이 눈 여겨 볼 문장이 있습니다.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주님은 이 갈등의 사건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셨습니다. 이 위기의 사건 속에서 도리어 사람을 세우셨고, 그 때에 세워진 사람들, 말씀으로 훈련을 받는 제자들로 하여금 저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에 이르러 복음을 전하게 했습니다. 이때 훈련된 사람들이 소위 헬라어까지 이중언어에 능통한 BILINGUAL이었습니다. 그들을 통해 마침내는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지고, 기독교 역사에 빛나는 첫 선교사가 파송되는 일을 이루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하여, 예루살렘 교회의 제자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본래 유대교에 속했던 제사장의 무리들도 예수를 영접하고 함께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결국 말씀이 왕성함으로 인해 교회는 힘을 얻습니다. 말씀을 먹고 기도하는 중에 교회가 살아날 뿐더러 교회가 성장해갑니다. 누가는 이 사도행전에 그 증언들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12장에서 이방인의 첫 구원 사건이 시작됩니다. 그 첫 사람 고넬료 가정의 회심 후에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행 12:24)
사도 바울이 1-3차 선교 여행을 마친 후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사도행전 19:20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행 19:20).
이 말씀들 속에는 모두, 말씀이 힘있게 전파되었다는 말이 교회가 성장했다는 말과 함께 나와 있습니다. 말씀이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말씀을 붙든 곳에 위기의 극복이 있었고 갈등 속에서도 더욱 성장하게 해가시는 성령님의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도 마귀도, 어떤 문제도 감히 성령님의 역사를 막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에 마귀가 시도했던 악한 도전은 무너졌습니다. 권력을 잡은 자들의 핍박도,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를 통한 타락과 부패의 시도도, 오늘 읽은 교회의 소명과 집중력을 분산시키려는 획책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만일 이런 시도 중에 하나라도 성공했더라면 교회의 역사는 태동과 동시에 그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벧엘교회도 없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 이방인을 위한 복음 전파의 놀라운 일을 이루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도들과 제자들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깨어 분별하였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분별의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성령님의 역사가 더욱 힘있게 나타나도록 말씀을 붙들고 열심히 기도하며, 각자의 소명의 자리에 충실하며,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제자로서 믿음이 든든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은혜를 구하는 기도> 사랑의 하나님, 오늘도 저희를 사랑하심으로 인해 우리의 믿음이 더해가고 성령님의 일하심이 더해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갈등과 위기를 도리어 성장의 길로 바꾸시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을 믿으며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의 제자로 불러주셨음을 인하여 감사를 드리며, 오늘도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며 주님의 뒤를 따라가기를 소망합니다. 초대교회로부터 오늘까지 교회를 통해 일하시며 교회를 세워가시는 성령님의 은혜를 사모하오니, 저희와 함께 하셔서 부르신 소명에 집중하여 잘 감당하며, 저희 마음과 입술에 말씀의 왕성함이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주님, 오늘도 주님께 예배하는 이들 위에 함께 하시고, 주님의 사랑 어린 위로와 소망으로 함께 하여주시옵소서. 우리에게 인생이라는 축복의 기회를 주셨고, 이 인생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길로 가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또한 맡겨주신 은사와 소명으로 주신 사역들을 선히 감당해낼 믿음을 더 하여 주시옵소서. 각자의 삶에 주신 귀한 은사들을 잘 감당하여 말씀을 전할 힘도 주시고, 온 교회가 말씀으로 힘을 더해가는 권능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성령님이 이기게 하심으로 김창운 담임목사 2017.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