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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국의 모형(模型)을 이루시는 성령님 (2017.08.06)
설교자     김창운 담임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사도행전 4장 32-37절
 
 
본문 내용
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Content


                행 4:32-37 천국의 모형을 이루시는 성령님
여름 무더위에 건강하십니까? 우리 주님께서 여러 어르신들과 우리 자녀들, 특히 육신이 허약하신 분들을 이 여름에 더욱 강건히 지켜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여름 휴가철을 맞아 많은 분들이 휴가를 지내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교육부 친구들도 수련회 여름성경학교를 잘 마치고, 가족간에 바다로 강으로 휴가를 지내고 계실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우리 주님은 제자들이 열심히 전도 사역을 감당한 후에 그들의 보고를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막 6:31).
주님은 안식의 필요를 창세로부터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인생이 휴식과 재충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시고 제자들로 하여금 잘 쉬면서 재충전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간 열심히 일하신 분들 잘 쉬시며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휴식이 좋은 것은 우리들 몸에 회복을 위해서도 좋지만,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사랑의 회복이 중요할 것입니다.
영국에 유명한 기독교 변증가이자 문필가인 C.S.루이스가 발표한 소설 중에 1942년 발표한 '스크루테이프의 편지(The Screwtape letters)'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이 흥미로운 것은 늙은 악마가 어설픈 조카 악마에게 편지를 쓴 형식입니다. 이 책은 악마를 찬양하기 위해 쓰여진 게 아니라 악마가 어떻게 사람을 유혹하고 있는지 알려주는 책입니다. 이 소설 속에 늙은 악마 이름이 '스크루테이프'인데, 그 조카 악마 ‘웜우드’가 지금 한 신앙생활을 시작한 남자를 악에 빠지도록 유혹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영 어설프니 보다 효과적으로 그를 넘어뜨리는 방법을 조언해주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입장에서는 영적 세계가 어떤 상태인지, 어떻게 악마가 사람들을 미혹하고, 넘어뜨리려 하는지 알고 거기에 잘 대비하도록 하는 내용입니다. 이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악에 빠뜨리고 넘어뜨리는) “제일 좋은 방법은 매일 만나는 이웃들에게는 악한 마음을품게 하면서, 멀리 떨어져 있는 미지의 사람들에게는 선한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지. 그러면 악한 마음은 완벽하게 실체의 것이 되고, 선한 마음은 주로 상상 차원에 머무르게 할 수 있는 것이지."
악마는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 가장 사랑하며 살아가는 인생의 동반자들을 미워하고,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만 호의와 선한 마음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본래는 주님의 은혜로 새롭게 되어 변화된 성도들로 하여금 사랑과 선행은 머릿속에만 머물게 해서 사랑의 실천을 못하게 습관을 들여버립니다. 우선 순위가 뒤바뀌면서 삶에 혼란이 오고, 무언가를 위해 수고는 하지만 참된 기쁨이 없으며 점점 본질을 잃어가다가 결국엔 모든 것을 잃도록 하는 것입니다. 바쁜 일상을 살며 이런 악마의 장난에 무방비였던 자신을 돌아보며 그간 미루었던 사람들과 사랑의 표현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간 뒤로 미루었던 부부간에 가족이나 친구간에 사랑의 우선 순위를 잘 회복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믿음의 동반자들 중에서도 그간 미루어 두었거나 머릿속에서만 있던 사랑의 회복이 필요할 것입니다. 웬지 말하기가 면구스러웠거나, 체면이 있어 못했거나, 언젠가는 하겠지 하고 뒤로 미루었던 우정과 사랑의 표현들도 회복하는 이 여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오늘 우리가 가장 사랑하고 선한 마음으로 대할 사람들이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여러분 곁의 믿음의 가족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말씀에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하였습니다.(갈 6:10). 우리 벧엘교회에서 만나 천국까지 함께 걸어가는 믿음의 가정들에게 그야말로 참된 사랑이 오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웃 사촌이라잖아요? 우리는 영적인 이웃사촌인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성령께서 바로 그 일을 이루고 계십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앉은뱅이가 일어난 사건으로 교회에 성령님의 증거들이 더해갑니다. 성령의 일하시자 핍박 속에서도 오히려 교회가 더욱 담대해졌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고백하며 간절히 기도할 때 4장 31절 말씀에는 무리가 다시금 “성령 충만하였다”고 기록합니다. 그래서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고 했습니다. 성령님이 일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들이 성령충만하자 성령이 친히 일하시며 그 교회에 더욱 놀라운 일들이 나타났습니다. 성도들이 모인 초대교회, 그 자리에 성령께서 천국의 모형을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32절 말씀을 한 번 읽겠습니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성령의 역사가 이렇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44-47에도 거의 똑같이 성령께서 일하시는 교회의 모습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2:44-47)
성령님이 일하신 교회였습니다. 사도와 그 제자들이 성령에 충만하자 성령이 친히 이루어내시는 천국의 모습이 이 교회 속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물질의 많음과 적음에 상관 없이 모두가 행복했습니다. 서로 서로 있는 자가 없는 이들을 위해 물건을 통용합니다. 소위 유무상통입니다. 서로 서로 나누니 34절 말씀에는 가난한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일까요? 성령충만의 증거입니다. 성령께서 이것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천국의 모형을 이 교회 속에서 이루시는지 세가지를 보실까요?
첫째, 모든 물건을 공동으로 소유했다고 했습니다. 2:44에서나 4:32에서나 똑같이 기록합니다.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했다’(하판타 코이나)는 말씀입니다. 혹 이단교회들은 이 말씀을 가지고 ‘온 교우들이 교회에 모든 소유를 바치고 공동으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실제로 믿음이 들어온 초창기에, 말씀을 올바로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교인들의 물건을 자기 맘대로 가져가면서 ‘성경에 이렇게 살라고 했잖느냐?’ 웃지 못할 일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정확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 이후에 말씀에 보면 바나바라는 인물이나, 아나니아 삽비라라는 부부도 개인의 재산을 사적으로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성도의 소유는 모두 공동소유권을 위해 사적 소유권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32절에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다”이 중요합니다. 사유 재산을 가지고 있었지만, 성도들은 모두 하나같이 자신들의 소유를 가난한 형제자매를 돕기 위해 사용할 수 있다는 마음과 뜻으로 하나가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사랑의 심령으로 하나된 공동체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나바라는 분이 대표적으로 그 일을 실천했음을 보여줍니다. 본래의 이름은 요셉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별명을 지어주었습니다.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에게 임하신 성령 충만의 역사가 너무도 아름다운 사랑과 위로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지은 이름임에 분명합니다. 그 분 외에도 자신의 밭과 집을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고 했습니다.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놀라운 천국의 일이 그 안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성령께서 주 예수의 부활의 증언이 권능 있게 전파되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일에 모이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부활의 증인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구약의 안식일 제정은 지금의 토요일입니다. 주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날이 안식일 후 첫 날이었습니다. 사도들도 사도의 제자들도 주일에 모여 예배하며 주님의 부활을 예배하고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였습니다. 부활 증언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주일에 모여 예배하며 사도신경을 통해 분명히 믿고 고백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부활인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복음의 핵심이요, 우리의 소망인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전하는 설교마다 거듭 전하는 것처럼, 죄인된 인간으로 인해 예수가 십자가에 죽었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살리셨습니다. 그를 영화롭게 하시고, 그 분을 믿고 회개하는 자는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복음의 능력을 입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교회의 본질인 부활의 역사를 증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부활을 증거하였고, 그로 인해 교회가 큰 은혜를 받았다고 기록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믿음의 분명한 근거는 부활하신 주님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부르고 부를 찬송은 주님께서 부활 승리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백 속에 부활 신앙이 분명하여, 믿음이 굳건하고, 은혜가 더 해가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가난한 자가 없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자기의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지 않는 그 한 마음과 한 뜻이 그 교회를 넉넉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장로교회의 신학적 모태가 되는 장 깔벵 목사님은 오늘의 이 말씀을 주석하면서 대단히 의미있는 말씀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이 기사를 읽고서 감동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강철보다 거 단단한 마음을 갖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 당시에 성도들은 자신의 것을 풍성하게 내주었지만,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보유하기에 급급할 뿐만 아니라 무정하게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야만 흡족해 합니다…. 그들은 당시 자신의 소유를 팔았습니다만, 오늘날 최고로 세력을 떨치는 것은 (팔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사려는 욕망입니다. 그 당시에는 사랑으로 인해 각 사람의 소유가 곤궁한 사람을 위한 공동재산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몰인정한 나머지 가난한 사람들과 이 땅에 같이 사는 것도 꺼립니다. 물, 공기, 하늘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것 조차 아까와 하며 꺼립니다.
오늘 현대인들에게도 그대로, 아니 더욱 심각하게 적용되는 해석일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해서 행복한가 했을 때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현이 말한 대로 <집은 좁아도 같이 살 수 있지만, 사람이 속이 좁으면 같이 못산다>(김구)고 하잖습니까? 본래 사람은 사랑하고 나누며 살아야 행복한데, 세상의 풍조는 빼앗고 내 것만을 지키게 하여 스스로를 불행에 빠뜨리고 있는 것을 영적으로 깨달아야 할 때인 것입니다.
초대교회에 “가난한 자가 없다”는 말씀이 무엇이겠습니까? 모두가 넉넉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신비로운 역사와 성령님의 충만을 사모한다 하면서도 손익 계산에 대해서는 천재적 능력을 발휘할 수가 있습니다. 현 세대가 그렇게 우리 심령을 작동하게 만듭니다. 그런 마음으로 계산을 해볼 때 서로가 유무상통하고 한마음으로 내어놓고 살아가면 누군가는 손해나는 사람이 없었을까요? 가난해지는 사람이 있지 않았겠느냐는 말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기록하지 않습니다. 넉넉했습니다. 천국처럼 넉넉해서 그들이 나눔으로 인해 그 심령들 속에 더욱 풍성해지는 은혜들이 채워진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가 있을까요? 주님이 약속하셨잖아요. 눅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가난한 자를 위해 나누면 채워 주시겠다 하시는 주님의 약속으로 나누고 또 나누고 퍼주고 또 퍼주어도 넉넉히 살 수 있게 되는 교회였습니다. 마 25장에 우리 주님께 마지막 날에 임금이 되어 다시 오실 때 있게 될 언약의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마 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아버지께서 너희를 위하여 왕 노릇 하게 하실 그 나라,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하시는 것입니다. 그 때 이 사람들이 이 나라를 상으로 받을 자격이 무엇이라고 기록하였나요? 마 25:40절에 있는 임금의 말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가난한 자, 작은 자입니다. 주린 자, 목 마른 자, 나그네 된 자라고 했습니다.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라고 했습니다. 이들을 위해 한 일이 곧 주님께 해드린 일이요, 그것으로 주님이 예비된 나라를 상속으로 주신다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생각할 것은 우리 믿음의 어른들이 정말 성도와 교회를 위해 헌신을 보여왔으며, 오늘 우리들 속에서도 조용히 성도들을 위해 내어놓은 헌신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사랑입니다. 사랑? 그걸 모르겠습니까? 그 사랑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묻고 싶은 거죠? 바로 그것이 성령님의 능력입니다. 내 변덕 끓는 의지와 양심에서 나오는 사랑이 아니라, 내 속에 채우신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해주시는 그 능력 말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은혜를 붙들고 기도하며 부르짖으며 성령의 능력을 체험해보시지 않았습니까? 성령 충만의 능력이 우리 영혼을 사로잡을 때의 소감이 어떠했습니까? 시 63편 3-4절에 보면 다윗이 참으로 귀한 영적 고백을 합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시 63:3-4)
다윗이 깊은 묵상 중에 주님을 만나고 성령으로 충만해졌을 때의 고백입니다. 그 영혼이 성령의감동을 입자, 주님의 인자하심, 그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그 인자하심(헤세드)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말로 다 할 수 없는데, 그 인자하심을 경험하자 내 생명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주님의 사랑이 점점 커져 저 우주만큼이나 커져가는 것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내 생명이 얼마나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인지를 보게 되는 거예요. 주님이 커질수록 내 영혼이 점점 작아지고 또 작아지면서.. 점점 작아지다 아예 나는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천국이 그것입니다. 성령 충만의 경험이 그것입니다. 주님의 인자와 사랑은 놀랍도록 커지고, 나는 그 사랑 안에서 점점 작아지고, 작아지고, 아예 사라지는 것입니다 주님만이 살고 나는 사라지는 것입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세상에 돈 귀한 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전답 귀하고 집 귀하고 재물 보석 귀한 것, 모두가 같습니다. 다만 주님을 만나고 그 사랑이 우주만큼이나 큰 것을 발견하자, 그 사랑 안에서 내 자아는 죽고, 내 욕망도 죽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자 내게 속한 소유도 같이 죽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속에서 클수록 나는 너무 작고 작아지고, 주님의 마음만으로 채워지고, 주님의 그 사랑이 이 물질을 내어놓게 하는 거예요.
형제 사랑이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성령께서 주님의 마음으로 충만하게 채우자, 저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마음이 내 마음 되어 너무도 귀하고 귀한 영혼을 내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그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낮아지고 형제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천국의 모형은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천국처럼 한 마음으로 내어 놓고, 천국처럼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이 높이 찬양 받으며, 천국처럼 가난한 자가 없이 넉넉하고 풍성한 삶을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이 천국의 모형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오늘도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예배와 여러분의 기도의 삶 속에서 성령께서 충만히 임재하심으로 주님의 사랑이 그 속에 무한히 커지고, 내 생명은 한없이 작아지는 그 은혜의 체험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은혜를 구하는 기도> 사랑하는 주님, 오늘도 성령의 감동으로 제 영혼에 함께 하심을 감사합니다. 살아계신 주님의 역사가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사오니, 오늘 이 기도의 자리에서 제 속에 더욱 충만하여 주시고 저와 우리 가정, 우리 교회 속에서 일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주님, 내 속에서 무한히 큰 사랑으로 함께 하심을 체험하게 하옵소서. 내 속에 정한 영을 새롭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주셔서, 주님의 사랑이 내 속에서 무한히 커지고, 나의 생명과 욕망은 한 없이 작아지는 체험들을 갖게 하옵소서. 그 은혜로 살게 하시고 그 은혜로 힘있게 하시고, 그 은혜로 치유되게 하시고, 그 은혜로 오늘도 세상을 넉넉히 이기며 이끌어 가는 삶이 되게 옵소서.

 

핍박 속에서 일하시는 성령님 김창운 담임목사 2017.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