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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2017.06.11)
설교자     김창운 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사도행전 2장 5-13절
 
 
본문 내용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Content


                      행 2_5-13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영국이 세익스피어 다음으로 자랑하는 19세기의 대문호가 있습니다. 찰스 디킨스라는 분입니다. 자린고비 스크루지 영감의 회심 이야기를 다룬 <크리스마스 캐롤>이라는 작품이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이 분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로 꼽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누가복음 15장의 소위 <탕자의 비유>라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세상을 살아보겠다고 아버지를 떠났다가 모든 것을 다 잃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 자신을 떠난 아들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아버지, 그리고 마침내 돌아온 아들을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죽었던 내 아들이 돌아왔다’며 기뻐하며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 그 이야기가 아름다운 것은 사랑과 진리의 자리를 떠났다가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는 줄거리가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를 하염없이 사랑하는 아버지의 사랑의 위대함에 감동하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길에서 돌아가는 것! 이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참된 행복과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말씀 말씀이 우리에게 귀한 것이 같은 이유입니다. 노아의 방주처럼 세워진 우리 교회를 배라고 했을 때, 그 항로가 0.1도만 틀어진 채 100킬로미터를 가고 나면 본래의 목적지와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인생 행로 또한 각도가 0.1도만 틀어져도 그 종착지는 주님이 원하시는 것과는 크게 다를 수밖에 없기에, 우리는 마치 사격 선수가 과녁을 겨누고 숨을 고르듯이 한 숨 또 한 숨 고르면서 분명한 목표를 잡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영혼의 길을 제공하는 것이 성경이요, 사도행전의 말씀이야말로 여러분과 제가 함께 가는 벧엘방주의 키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까지도 은혜 속에 잘 걸어왔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사도행전의 말씀 한절 한절이 잠자는 영혼은 깨우고, 녹슬거나 기력이 쇠한 구석구석들을 성령의 기름으로 새롭게 하는 역사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오순절 아침, 성령이 강림하고 모여있던 120명의 성도들 각 사람에게 성령 충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불의 혀와 같이 갈라지면서 각 사람에게 임하자, 성령으로 충만해지고, 각 사람이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했다고 성경이 증언합니다. 다른 언어, 영어로는 in other tongues라고 했습니다. 보통 자기가 태어난 나라의 말을 모국어라고 합니다. 어머니 말이라고 해서 mother-tongue이라고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가 가르쳐준 말이란 뜻입니다. 어머니가 가르쳐준 마더텅이 아니라, Other tongue(다른 언어)로 말했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찬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갖는 방언인 것입니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헬라어 원어로는 “글로쏠랄리아”라고 합니다. 제자들 모두가 방언으로 말했습니다. 그들이 방언으로 말할 때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이 소리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듣고 소동하였다고 했습니다. 이 경건한 유대인들이라는 사람들이 소동하며 놀라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이 120명의 제자들이 말하고 있는 아더텅이 그들의 마더텅이었던 것입니다. 이 제자들에게는 외국어인데 이 사람들에게는 모국어, (8절에 표현처럼) 자신들이 난 곳 방언으로 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놀라운 것은, 이 사람들이 이 외국말을 배운게 아닌데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7절 하반절에 이 사람들이 “이 사람들이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라고 하는데, 이 말은, “이 사람들은 아무런 교육도 받아본 적이 없다고 알려진 촌 사람, 갈릴리 사람들 아니냐” 하는 말입니다. 어학 연수는 물론 어떤 배움의 과정도 겪지 못한 이들에게서 이런 언어가 나오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놀람인 것입니다. 셋째, 이들이 말하는 것을 그들이 들은 내용입니다. 11절의 기록처럼, 모두가 하나같이 다른 나라의 말로 하고 있는데, 이 경건한 유대인들은 청취가 가능하였고, 그 내용은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기적이 바로 성령 충만이 이루어낸 첫 번째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와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기적이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는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발현이요,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소중한 계시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을 영접했고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면 누구나 성령의 충만을 입고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성령님을 약속하셨고, 마침내 그 성령님을 주셨습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방언으로 이 제자들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성령 충만과 방언의 사건은 우리에게 소중한 가르침을 줍니다. 그 중 세가지만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 오순절 성령 충만과 방언 사건은 역사의 반전을 보여줍니다. 저주에서 복으로 바뀌는 반전이요, 분열에서 하나가 되는 반전 말입니다. 창세기 11장에는 인류의 비극적인 역사가 나옵니다.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습니다. 사람들이 동방으로 이주하다가 시날평원이란 곳에 이르자 좋았습니다. 살만했습니다. 거기에서 큰 계획을 세웁니다. 성읍과 탑을 크게 세우자는 것입니다. 11장 4절에서 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자. 그래서 우리 이름을 내자. 우리가 하늘까지 닿은 그 탑을 마음껏 뽐내며 살아보자.” 이 사람들은 노아의 방주를 통해 살아남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지개 언약을 주시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 에덴과도 같이 하나님과 아름다운 만남과 예배의 행복을 누리도록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잊었습니다. 살만하자 자기의 이름을 높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슬퍼하셨습니다. 탄식을 하셨습니다. 이들이 언어가 하나임으로 인해 이런 교만의 역사를 이루고 있으니 언어를 혼잡케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바벨, 즉 혼잡, 무질서가 됩니다. 본래 코스모스, 질서이던 세상이, 혼잡이 된 것입니다. 노아 방주의 큰 축복을 받았던 셈, 함, 야벳의 자손들은 하나님을 떠남으로 결국 언어가 갈라지고, 온 지면으로 흩어지는 저주의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님의 강림과 충만은 바로 이 언어로 혼란되었던 인류 역사의 반전이었습니다. 다인종, 다민족, 다언어의 혼잡의 역사가 가진 장벽이 허물어진 것입니다. 온 땅으로 흩어져 각자의 언어를 쓰며 갈라졌던 인류가 하나님의 성령 강림을 통하여 하나로 뭉쳐지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해 하늘을 향해 치솟고자 세웠던 바벨의 저주 역사가, 하늘로부터 겸손히 이 땅에 임하신 성령님으로 인해 코스모스, 질서와 화평의 복이 회복되는 역사로 반전된 것이었습니다.
이 방언을 하는 제자들을 보고 놀란 사람들은 천하 각국에서 온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오늘의 말로 하자면 유대인 디아스포라였습니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할 때(BC 722), 첫 디아스포라가 생겨났습니다. 그 후 바벨론에 페르시야에 로마에 식민지배를 당하면서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사방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이들이 오순절을 맞아 명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그만큼 열심이 있는 사람들이었기에 경건한 유대인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살던 곳을 정리해보면 다섯 그룹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그룹인 바대인 메대인 엘람인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유대의 동쪽에 살던 사람들로, 아람어를 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둘째 그룹인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이야 출신 사람들은 사도행전 13장에서부터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여행을 가게 되는 소아시아 지역입니다. 셋째 그룹인 애굽과 및 구레네 가까운 리비야 라고 한다면 아프리카 지역인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시와 구레네 도시로 흩어져갔던 사람들을 말합니다. 네 번째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 그룹은 로마를 중심으로 한 유럽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다섯 번째 그룹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은 그레데라는 섬과 중동 아라비아에서 온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유대인이었지만 흩어져 있었습니다. 언어도 달랐습니다. 혈통도 달랐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사람들이 바벨 시대에 흩어졌던 셈, 함, 야벳의 후예입니다. 함족은 애굽과 리비야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야벳족은 그레데와 로마에 거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셈족이었습니다. 이들이 돌아와 하나가 된 것입니다.
명절이 되면 이 흩어졌던 사람들이 예루살렘 도처에서 출신 그룹별로 모여 각 나라 말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순절 날, 이 사람들이 놀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각 나라 그룹들이 각 나라말로 찬양을 하는 것 아니라, 한 그룹이 다섯 그룹의 말로 찬양을 합니다. 모두가 이 한 그룹을 주목합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각 나라 말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멋진 광경이었을 것 같지 않습니까? 다른 나라의 언어지만 하나의 찬양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각자 다른 음성이요 다른 인격이지만 한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 예배의 의미가 참으로 큰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9-10에는 우리를 위해 예비된 은혜로운 구절이 있습니다.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우리가 부를 찬양이요, 온 민족과 더불어 하나님을 높이게 될 예배입니다. 성령님의 충만함이 오늘 우리에게 임하셔서 바벨의 분열이 오순절의 하나됨으로 반전되는 역사와 인생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오순절 성령 충만과 방언의 사건은 성령의 주도 사건이었습니다. 4절 말씀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라고 했습니다. 2장 14절 이후에는 사도 베드로가 성령 충만하여 첫 설교를 하는데, 38절에 분명히 증거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여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바로 그런 회개와 세례와 죄 사함의 경험을 했고, 성령의 충만을 받아, 성령의 말하게 하신 방언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에서 그 사람의 성품이 나옵니다. 말에서 그의 출생지도 나오고 그 사람이 속한 신분도 나오고 그 사람의 학식이나 습관도 나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출신이나 신분이나 학식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방언이 무엇입니까? 성령님이 그들의 인격을 사로잡고 그들의 말을 점거한 것이고, 성령님이 그들에게 말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들의 성품과 행실을 성령께서 압도하시고 주장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습니다. 한 선교 보고에 의하면 러시아에 간 한국 선교사 한 분이 러시아 언어를 배우기도 전에 러시안 말에 능통했다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쓰시는 것입니다. 한 분은 영어 방언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평소 영어도 잘 못하던 사람인 유창한 영어를 방언으로 받았습니다 모두들 부러운 눈치입니다. 저도 한창 영어를 공부해야 할 때는 부러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알아보니 그게 일시적으로 받았다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만 쓰시는 것이죠.
방언을 받아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사도행전의 기록처럼, 방언은 성령께서 임하시고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방언을 하면 시끄러워진다고 해서 그것을 금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방언은 해로운 것이 아닙니다. 방언기도 하는 사람을 비웃으면서 자기는 기도를 하지 않는 판단자가 있다면 그 사람의 판단이 해로운 것입니다. 성령님께 맡기는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맡겨야 합니다. 방언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요 거두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방언 뿐 아니라 어떤 은사도 하나님이 주시면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은사를 통해 내 인생을 쓰시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령님이 말하게 하신 방언과 은사라야 하는 것입니다. 방언은 다른 종교에도 있습니다. 악령에게도 있습니다. 미신에게도 있습니다. 이단에게도 있습니다. 요한일서 4:1은 우리에게 중요한 말씀을 전해줍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방언과 은사에 분별이 있어야 합니다. 방언을 주신 분이 성령님인가 영 분별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분별의 기준이 있을까요?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성령의 열매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성령의 사람이 품게 되고 맺게 되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과연 내가 성령에 속해있는가 그 기준을 가늠할 수 있는 길입니다. 성도의 중요한 믿음의 이정표입니다. 성령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얻게 되길 사모 하고, 과연 내 믿음의 경륜 속에서 어떤 열매가 무르익었는지 측정해야 하는 변화의 지표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아들이십시오. 성령님이 주시고자 하신다면 어떤 은사도 방언도 거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박윤선목사님이라는 분은 합동측의 유명한 교수이자 학자입니다. 이 분은 공공연히 방언을 부정했습니다. “지금 시대는 방언의 시대가 아닙니다. 그런 걸로 신앙의 잣대를 삼으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랬다가 이 분이 방언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공적으로 자신의 발언을 철회했습니다. 미국에서 만났던 클라우스 이슬러 교수 또한 방언과 은사를 부인하던 분입니다. 눈이 멀어지자 기도하는데 방언을 받고 눈도 고침을 받았습니다.
성령님이 방언은사를 주시는 것은 나이를 따지지 않습니다. 박윤선목사님은 70대였습니다. 림형석목사님은 50대였고, 이슬러 교수님은 40대였습니다. 저는 30대였고, 제가 집회를 하면서 가장 어린 경우는 5살아이도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간절히 사모하며 성령 충만을 구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간구하는 자가 우리 주님 말씀하신대로, <내 양들에게 생명을 주고, 더 풍성하게 해주시는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성령을 사모하는 기도를 쉬지 않고 드림으로, 성령의 열매들이 우리들 속에 더 풍성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오순절 성령 충만과 방언 사건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의 시작이었습니다. 교회의 확장의 서막이었다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하나님이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누가복음 3:21-22에 보면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이 예수님 위에 강림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4장에 시험 받으시기 전에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4잘 14절에도 시험을 이기신 주님이 갈릴리에 사역을 시작하실 때 성령이 충만하여 갈릴리로 들어가셨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 모든 사역을 성령의 충만을 입고 감당하신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 또한 그들의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1:3의 말씀처럼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제자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이제 제자들도 주님이 명하신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주님과도 같이 성령 충만이 있어야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위해 성령 충만을 주셨고, 이 제자들이 드디어 그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선교를 시작합니다. 기적들이 나타납니다. 때로는 어려운 일도 일어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의 교회들이 세상을 향해 퍼져나갑니다. 꾸준히 끈기있게 힘있게 말입니다. 그 일을 누가 이루시는가? 성령께서 이루어가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들을 우리가 꾸준히 읽어가면서 이 사도행전의 이야기가 우리 벧엘행전의 이야기로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교회사가들에 의하면, 이 오순절에 성령 강림과 방언의 역사를 바라본 저 멀리서 온 유대인들을 통해 세상 속에 성령님이 역사가 퍼져나갑니다. 그들의 세계, 그들의 지역, 그들의 삶의 자리 속으로 말입니다. 그들이 돌아간 다메섹에서 예수를 믿는 이들이 나타납니다. 바울이 사울이었던 시절 다메섹 예수 잔당을 체포하러 가던 사건이 바로 그들입니다. 로마로 돌아간 이들이 로마에 교회를 세웁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쓴 이유가 바로 이 때 회심하여 돌아가 교회를 세워 예배하던 공동체를 향해 보낸 것입니다. 저 알렉산드리아로 리비아로 아라비아로 구레네로 복음의 역사들이 성령님의 이 강림 사건을 통하여 불길처럼 퍼져간 것입니다. 시들어가는 불이 아니라, 맹렬히 타오르는 성령 충만의 사건들을 통하여서 말입니다.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모든 사람은 목적이 있습니다. 사상이 있습니다. 세계관이 있습니다. 인격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아버지의 집을 떠났던 자가 아버지께 돌아가는 발길이 가장 아름답듯이, 세상의 영에 취했던 자들이 살길, 그 영혼이 가장 아름답게 되는 길은 성령님께 사로잡히는 길 밖에 없습니다. 고단하다 힘들다 바쁘다 복잡하다 혼란하다. 이 모든 것은 인류가 만든 바벨이라는 비극의 역사에서 왔습니다. 이제 그 혼란과 분열의 역사를 반전하여 하나되게 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채워 그 입을 쓰시는 성령님의 충만을 받아 참으로 힘있고 아름다운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을 초청하는 기도> 성령님 오시옵소서. 제 인생에 성령님을 초청합니다. 제 영혼에 오시고, 제 인생에 오시옵소서. 성령님의 권능으로 제 몸에 오시고 성령님의 인격으로 제 인격을 압도하여 주시옵소서. 제 입술을 통하여 말하게 하시고, 제 인생을 써 주셔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성령님을 듣고 보고 충만케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주님, 성령님의 강림을 구하는 자에게 오시옵소서. 성령님의 충만을 다시금 구하는 자에게 부어 주시옵소서. 채워주시옵소서. 성령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자에게 성령님의 증거를 보게 하시고 듣게 하시고 체험케 하여 주시옵소서. 충만하여 주시옵소서. 불길의 혀로서 닿아주시고 아버지의 호흡이신 바람으로 임하소서. 오늘 우리 위에, 한 사람도 남김 없이. 다 충만함의 체험을 주시옵소서. 성령님을 주심으로 반전의 역사를 이루시고, 온전히 성령님께 쓰이게 하시며, 성령의 은사와 열매들이 힘있게 살아나게 하옵소서. 언제가 구하는 자에게 주시겠다 하신 약속을 이루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김창운 목사 2017.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