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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내 아버지 집에 (2017.05.07)
설교자     김창운 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누가복음 2장 49-52절
 
 
본문 내용
49.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50.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51.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Content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어린이 주일은 1856년 미국 메사츄세츠의 첼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유니버설리스트 제일교회 찰스 레오나르드라는 목사님이 어린이들을 모아 예배하며 하나님께 헌신하도록 설교하고 축복하였습니다. 그리고 부모님들에게 자녀들이 어려서부터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도록 교육해야 한다고 교훈하였습니다. 이 날이 6월 둘째 주일이라 매년 6월 둘째 주일을 ‘어린이 주일(꽃주일)’로 지켰고, 한국교회도 1920년부터 6월 둘째 주일을 어린이 주일, 꽃주일로 지켰다고 했습니다. 온 예배당을 꽃으로 장식하고 어린이들에게 목사님들이 축복해주는 날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22년 소파 방정환 선생을 비롯한 색동회의 노력으로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하였습니다. 어린이들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민족정신을 심어주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1939년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되었다가 해방이 되어 1946년에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정하였습니다.
한국 교회는 1957년, 색동회가 어린이 헌장을 선포하면서 5월 첫 주일을, ‘어린이 주일 곧 꽃 주일’로 정하여 지금까지 지키고 있습니다. 당시 교회에는 화모(花母)라고 꽃을 관리하시는 여직분자가 있었고 그날은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으로 가득했다고 합니다. 오늘도 강단을 위해 수고해주신 오늘의 화모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어린이는 어린 사람입니다. 어린 아이를 줄여서, 격식을 갖추어 부르는 말입니다. 어리기 때문에 돌봄이 필요하고, 도움이 필요합니다. 몸과 마음이 봉오리처럼 맺혀서 이제 영글어야 하고 자라야 하고 피어나야 할 사람입니다. 어느 시인이 쓴 말이 있습니다. <우리 아이의 하얀 도화지에 무엇을 담을까> 예. 무한한 잠재의 여백을 그 몸과 영혼에 품고 있는 어린이는 참으로 꽃입니다. 웃음 띤 얼굴이 꽃이요, 우는 얼굴도 꽃입니다. 자는 얼굴도 노는 얼굴도 그 모습 그댈로 꽃입니다. 창조의 원리에 따라 열매로 영글어 갈 무한한 가능성의 꽃인 것입니다.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면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이 무한한 가능성의 어린이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첫째, 주님은 어린이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매우 평범해 보이는 이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에 더 평범해 보입니다. 누가복음 18:16에 보면 사람들이 아이들을 데려왔는데 제자들이 꾸짖었습니다. 주님께서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셨다고 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이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셨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아이들을 막고 있지만, 예수님은 사랑스런 모습으로 그들을 보시며 안아주시고 안수하시고 축복해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다.” 어린이에게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어린이들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요6장에 오병이어의 이적에서 한 어린이의 착한 손길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말씀을 받은 이들 5천명이 모여 있습니다. 그 중 유일하게 도시락을 내놓은 사람은 이름도 모르는 한 소년이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말합니다. 그 많은 사람 중에 먹을 것을 가지고 온 사람이 이 아이뿐이었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적어도 어른들에게도 이 어린이의 작은 도시락보다 무언가 적잖이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어떤 사람들인데요. 그런데 주님께 내어놓은 사람은 이 한 아이입니다. 이것이 어린이 마음이죠. 우리 주님은 바로 이 한 착한 어린이의 정성을 쓰셨습니다. 그 손길에서 나온 작은 것으로 세상이 놀랄 큰일을 하셨습니다. 오천명을 먹이셨습니다. 여기에는 이 어린이보다 많이 가졌던 어른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그 아이 덕에 배불리 먹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질문합니다. “누가 더 행복했을까”라고 말입니다. 착한 믿음의 정성을 주님께 내어 놓자 저 5천명 사람들이 배불리 먹는 것을 바라보는 이 어린이가 행복했을까, 자기 것은 아직 남겨두었기에 이것도 가졌고 저것도 누린 그 사람이 더 행복했을까? 최소한 사랑과 나눔의 행복 법칙을 담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 소년이 비교할 수 없이 행복했을 것입니다. 내 것을 써 주시는 주님, 그 음식을 주님이 축사하시는 감격, 그것이 5천명에게 나누어지는 이적, 모든 이들이 마음껏 먹고, 주님이 그것을 거두라 하셨을 때 열 두 광주리가 남아있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도시락 하나가 12광주리로 남는 광경을 보고 제자도 놀라고 사람들도 놀랐지만, 이 어린이야말로 가장 놀랐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어린이 속에 하나님 나라의 현실이 임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란 말씀은 이 어린이의 마음과 손길이 하나님 나라에 합한 것이었음을 말합니다.
요셉은 어린 시절의 모습부터 우리 믿음에 도전을 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환상을 꿈으로 보던 인물이었습니다. 총명하고 지혜가 있고, 무엇보다 하나님께 민감하지 않고서는 그런 꿈을 받을 수 없었음을 생각할 때,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의 전권적 은혜와 또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인생 여정을 거치며 아름다운 꿈을 성취해내는 스토리로 열매 맺는 것을 봅니다. 다윗의 이야기도 그렇고 다니엘의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어린이들이 가진 순수함 말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사랑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귀히 보시고 하나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 말씀하시며 사랑의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자녀들을 많이 사랑합니다. 가장 좋은 것으로 잘 해주고 경쟁 사회에서 이기게 하려고 많이 노력들 합니다. 이 노력들은 무엇에서 나오는 것인지 조심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족이 유월절이 되어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내려갑니다. 친척들과 함께 다녀가는 중이라 예수님의 부모는 돌아가는 동안 동행인들 중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하룻길을 가고 나서야 예수님이 없어진 것을 알았습니다. 실종된 예수님을 찾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서 찾는데, 사흘 후에야 찾았습니다. 성전에서 당시의 랍비들과 앉아서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시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겼다고 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을 걱정하여 묻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며 찾아 다녔다” 이 말에 주님의 대답하신 것입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였나이까”
이 대답은 부모 요셉과 마리아를 무시하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은 겸손하여 세상에 아기의 몸으로 오신 분이었습니다. 겸손하신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의 질서에 따라 왕관을 쓴 어른이 아니라 어린 아기로 태어나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나사렛이라는 이름 없는 마을에서, 오늘날 연민적 감정을 담고 있는 표현, 흙수저라 불릴만한 환경에서 목수의 아들로 자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본문 51절에 기록된 말씀처럼, 부모님을 순종하여 잘 받드셨던 분입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이 말은 주님의 하나님의 사명을 띤 분으로서의 독립적 가치를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자신의 아들이기 전에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우리 아이들은 우리 아이들이기 이 전에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고유한 그의 독립적 가치와 먼저 하나님의 자녀된 인격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양육하도록 맡겨주신 자녀인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의 참된 사랑입니다. 유교적 가치관에서 온 애착이나 소유가 아니라 신앙적 사랑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얀 도화지같이 맑고 고운 영혼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깨끗하여서 쉽게 내놓을 수 있는 마음, 쉽게 손 내밀고 쉽게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아이들 안아주시고 축복하시던 주님의 사랑을 본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주님은 “아버지의 집에 있는 것”에 우선 순위를 두셨습니다. 어린 아이들 뿐 아니라 우리 성인된 이들에게도 무엇이 삶에 우선순위가 되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은 “아버지의 집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아버지의 집’이란 말은 헬라 원문으로는‘아버지의 일’(엔 토이스)이란 말로도 번역됩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하나님 아버지의 일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있는 곳이 주님이 머물 자리이고 그분의 집이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 자녀들을 어떻게 교육하여야 하는지 귀한 가르침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미래를 생각하면 다음 세대를 위해 열심히 헌신하고 믿음으로 양육해야 함을 누구나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를 위해 열심히 장학사업을 하고 교육부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며 헌신하는 것은 참으로 귀한 사역입니다. 앞으로 우리 벧엘교회가 이 지역 속에서 그런 역할 면에서 더욱 앞서가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벧엘교회 60년 이후의 역사가 지속적으로 부흥하는 교회로 발돋움하는 소망을 이루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으로 믿습니다.
선진국일수록 고령화 현상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세계적인 저출산율과 더불어 세계 인구에 다섯 명 중 한 명이 60세 이상인 상태로 전개된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은 저출산율이 전세계 224개국 가운데 219위에 기록될 만큼 초저출산 국가라고 합니다. 이런 저출산의 원인 중 하나는 자녀 양육의 어려움 때움입니다. 너무도 힘든 경쟁 사회에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이 힘겹게 여겨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젊은이들의 세대가 설 자리가 없고, 이전 세대들의 복지 예산을 충당하기에 벅찬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는 세대가 현재 젊은 부모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암울한 상황이 우리 시선의 우선 순위가 되도록 자리를 내어주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성경이 전해주는 믿는 자에게 주시는 복이 무엇입니까? 고향과 친척, 편안한 삶의 자리를 떠나도록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이 기근 중에도 부자가 되고, 험난한 다종족 침탈의 문화 속에서도 길이 열리고, 이삭과 야곱과 요셉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복, 바라크를 믿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보다 훨씬 가난했던 시절을 살아오신 어른들이 가진 고백이 무엇입니까? 어떤 어려움, 어떤 고난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먹이셨고 입히셨고 여기까지 도우신 것 아니었습니까? 주님께서 마태복음 6:26에 말씀하신 것처럼,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하신 말씀이 참으로 진리였고 능력이었다고 고백하듯이 말입니다. 믿음의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로 영원한 생명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아버지의 집에서, 하늘 아버지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무엘상에 나오는 여인 한나는 우리가 잘 아는 신앙인입니다. 이 분은 오늘날처럼 혼란스럽던 시대에 사무엘이라는 위대한 인물을 낸 어머니였습니다. 이 분의 어떤 특별한 능력이 있었던 것을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한가지 이 분에게는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아이를 갖지 못함으로 인해 너무도 고통스러운 경험이 있었습니다. 격분하였다고 했습니다. 절실함입니다. 그가 실로의 원시 성전을 찾아갑니다. 그 곳에서 기도합니다.  통곡하며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걸듯이 기도하며 부르짖다가 기력이 쇠하여 입술만 움직이고 있는 것을 제사장이 보고 포도주에 취한 줄 알고 충고를 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기도를 통해 이 여인이 하나님의 응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 구하였고 하나님이 응답하셨습니다. 그가 아이를 낳습니다. 그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뜻하는 엘과 ‘듣는다”는 뜻의 쉐마가 합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뜻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의미도 됩니다. 여기에 이 여인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당시는 리더 부재의 시대였습니다.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던 시절이었습니다. 사무엘서의 서두에 이 한나가 그 마음이 간절하여 하나님을 찾아온 이야기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 한 사람의 태동을 위해 하나님은 이 여인을 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격분의 상황을 주셔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하십니다. 그 간절한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혼란의 시대 속에 하나님의 마음을 듣고 하나님의 나라를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을 찾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기록합니다.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자랍니다. 거기에서 자라는 사무엘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들려줍니다.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삼상 2:26). 여기에 비결이 있습니다. 그가 자라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가 됩니다. 블레셋을 물리치고, 왕들을 기름 부어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를 영적으로 세우는 지도자로 귀히 쓰이는 것입니다.
오늘 여호와 앞에서 자라며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품고 성장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 은혜와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우선 순위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아버지의 집에 거할 때 하나님께서 높이시고 귀히 쓰시는 것입니다.
셋째, 주님은 우리로 뭇 영혼들을 향해 가르쳐 지키게 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기독교는 교육의 종교입니다. 주님의 대위임령인 마태복음 28장에서 귀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28:20). 구약성경 신명기 6장에서도 성경은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신 6:4-9   
이 말씀은 우리가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할 것인지 가르쳐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교육 열풍은 대단합니다. 유치원 입학 경쟁으로부터 시작해서, 초중고 과정에서의 사교육 열풍과 진학과 대학의 교육 마저 상대평가 제도를 써서 우리 자녀들은 학교 친구간에도 치열한 경쟁 속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앞으로 살아갈 방도를 생각하며 참으로 암울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 젊은 부모들의 마음입니다.
자크 아탈리라고 하는 유명한 미래학자는 <미래의 물결>이라는 책에서 말합니다. 지금의 선택이 앞으로 50년 후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말입니다. 과거의 역사를 꿰뚫어보면서 미래의 펼쳐질 일들을 정치 경제 문화 인구 에너지 등등 전반적인 예측을 내어놓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불안한 미래에 대한 예견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끝에서 말합니다. 사랑이 남을 것이라고요. 우리 아이들이 사랑을 배울 곳을 찾아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본문 52절은, 주님의 어린 시절 모습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 받으시며 자라셨다”고 말입니다. 우리의 바램이 이것 아니겠습니까? 세상 속담이 말합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요. 우리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세상이 무너져도 영혼이 살면 도리어 풍성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요한삼서 1장 2절에 “영혼이 잘됨으로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게 되는 복”을 믿는 사람들이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것입니다.
수천억원의 돈을 가져도 영혼이 불안하면 범사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금수저로 밥을 먹고 금그릇에 국을 담고 다이아몬드 종지에 반찬을 담아 먹는다 하여도 영혼이 병들면 아무 일도 잘되고 강건한 일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에서 교회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믿음을 배우는 것에 소망이 있습니다. 사교육, 사교육 관심을 갖지만, 우리가 정말로 우직하게 사교육 해야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아이들이 정말로 받아야 할 사교육은 영혼이 잘 되도록 하는 교육인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 안에서 자라도록 하는 것이 참된 양육입니다.
가르쳐 지키게 하라 했습니다. 교육의 핵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부모 된 우리 모습입니다. 내가 사는 모습이요, 내가 믿는 모습이요, 내가 말하고 선택하고 행동하는 영혼의 모습이 전수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영혼이 행복해야 합니다. 내 영혼이 강건하고 잘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믿음으로 이루어내는 인격적 간증을 가져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간직하고 있는 공동체적인 간증이 있습니다. “우리가 애굽에서 종 되었을 때에…(이 말 앞에 모두가 숙연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릴 그 곳에서 구원해 내셨다,” 오늘 우리 가정의 공동체적 간증은 무엇입니까? 내가 살아가는 법을 믿음으로 승리하는 인격적 삶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입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자녀의 인격이 되고 내 마음에 갖고 있는 생각과 감정이 아이의 성품에 흘러갈 것입니다. 참으로 올바른 영혼의 교육은 하나님의 영으로 가능한 것이요,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기도해야 합니다. 한나와 같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최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면 그 아이는 부차적인 지식을 저절로 얻어갈 것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하신 언약의 말씀대로 말입니다.
어린이를 사랑하며, 아버지의 집에 거하는 믿음을 간직하고, 그 믿음을 잘 양육하여 전하는 것은 우리 시대에 하나님께서 맡기신 중요한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 자녀를 그렇게 길러주심으로 여러분의 가정가정이 “소망으로 거룩한 가정”이 될 수 있기 바랍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며, 주님의 뜻을 생각합니다. 주여 은혜를 주셔서, 오늘 어린이를 사랑하신 주님을 본받게 하시고, 아버지의 집에 거하고자 하는 믿음의 뿌리를 새롭게 하시며, 믿음의 길을 잘 가르쳐 지키게 하는 사명 잘 감당하게 하옵소서. 언약의 말씀으로 기도하오니, 이 믿음 먼저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구할 때, 이 모든 것에 더한 은총 각 가정마다 영혼마다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갈릴리의 재회 김창운 목사 2017.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