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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릴리의 재회 (2017.04.30)
설교자     김창운 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요한복음 21장 1-7절
 
 
본문 내용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Content



                              요 21:1-7 갈릴리의 재회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 사실은 수많은 사건들을 통해서 증거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8:20에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신 것처럼, 주님은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하시며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일하셨습니다.
살아계신 주님, 부활의 주님은 무엇보다 성경이 증거합니다. 사도행전 1장 3절에 보면,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살아계심을 나타내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4은 오늘 본문의 말씀이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신 것이었다고 말씀합니다. 요한 사도는 주님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을 20:19-23에서 처음, 24-29에서 두 번째로 나타나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오늘 디베랴 호수에서 세 번째 제자들을 만나셨다고 합니다.
성경은 이 40일 동안 제자들을 비롯한 믿음의 사람들에게 보이신 사건을 열 한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된 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 믿음의 사람들에게 보이시고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고, 복음의 일꾼으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또한 살아계신 주님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생생히 나타났습니다. 세계사 속에 나타난 부흥의 사건들을 통해서였습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부흥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주후 58년 에베소교회에서의 부흥이 있었습니다. 1481년 이탈리아 플로렌스의 부흥 운동이 있었고, 1517년 종교 개혁을 통한 개혁과 부흥운동이 있었습니다. 1630년 스코틀랜드의 커크오쇼츠(Kirk o'Shotts)에서 성찬예배에서의 부흥이 있었고, 1700년대에는 1차, 2차 대각성 운동이라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살아계신 주님의 역사는 살아계신 주님을 믿는 사람들의 기도 운동 속에서 1800년대에도 미국 하와이에, 자마이카에, 미국 로체스터에, 스코틀랜드의 킬시스(Kilsyth)에 부흥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1900년대 들어서면서 1907년 우리 동방의 해뜨는 나라 평양에서 대각성 부흥 운동이 있었습니다. 이어서 뉴질랜드에, 미국의 로스엔젤레스에 캐나다에 부흥이 있었습니다. 호주와 중국과 미국 캘리포니아 애너하임에, 아르헨티나에, 멕시코에 부흥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2000년대 들어서도, 아르헨티나에, 인도에, 인도네시아에, 우간다에, 콩고, 네팔, 파키스탄 지역에 살아계신 주님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살아계신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 예배 속에 살아계시고, 어두워가는 세상 속에서 새로운 일을 이루시기 위해 믿음의 사람들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신 곳은 디베랴 호수라고 했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디베랴 호수라고도 불렀습니다. 주후 20-22년에 유대의 분봉왕인 헤롯 안디바가 갈릴리 부근에 도시를 건설해서 티베리우스라고 하는 당시 로마 황제에게 헌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도시의 이름을 디베랴, 현대어로는 티베리아스 라고 이름 지었고, 그 이름을 따서 그 인근 갈릴리 바다를 디베랴 바다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이 이 곳에 찾아오셨습니다. 어부였던 제자들이 이 곳에 돌아와 고기 잡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7절에 보면 천사가 주님의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에게 소식을 전합니다.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6장 32절 말씀에서 이 사실을 미리 예고하셨습니다. 요 16:32에 보면,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제자들이 과연 갈릴리로 복귀해서 돌아가 고기잡이 일로 돌아간 것입니다.
베드로가 일행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사도 요한이 주목하여 기록한 베드로의 이 말은 그의 마음 상태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긴 하였지만 그 자신은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영적 사명을 감당하기에 너무도 자격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전으로 돌아가 어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를 부르셨고,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고 3년간 함께 먹고 자고 수련하는 소위 도제교육으로 가르치시며 하나님 나라를 전수하셨지만, 지금 그는 그 모든 것들과 작별하고 예전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요한은 그것을 주목하여 기록합니다. 이 사람 베드로는 ‘사람을 낚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를 잡으러 가는” 사람이 되어버렸다고 말입니다. 인생의 비극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뒷전이 되고, 먹는 것이 우선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신 사명이 포기되고, 물고기를 낚는 일에 빠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왕국의 소망을 붙들어 십자가를 지고 가던 길이 포기가 되고 금새 사라질 것에 올인이 되는 비극말입니다. 거기에는 결코 행복이 없음에도 확성기를 틀어놓은 듯 아우성 치는 세상의 소리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비극 말입니다.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제자들의 리더격이었던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는 혼자 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지금 물고기 잡으러 가는데, 누가 나와 함께 가겠느냐?” 하는 뜻입니다. 동조자를 구합니다. 그래서 나머지 제자들이 함께 갑니다. 비극에 더하는 비극은 동조자들을 끌어들여 함께 가는 것입니다.
이들의 결과가 어찌 되었는지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온 밤을 새웠으나 아무 것도 잡지 못합니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고 했습니까? 똑 같은 실패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 주님이 그 제자들을 부르실 때도 같은 일이 벌어졌었습니다. 밤새껏 수고하고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이 날 아침에도 제자들은 실패를 맛보며 쓴 침을 삼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가 무엇일까요?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이 가하신 주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이들을 버리신 것일까요? 저주하신 것일까요? 비웃고 조롱하시는 것일까요? 아뇨. 주님의 사랑은 여전합니다. 그럼 이 실패의 이유는요? 밤을 새워 수고를 하지만 고기가 잡히지 않는 것이 이들에게 유익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이 사건 속에서 주님이 이들을 만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무언가 가장 중대한 것을 망각한 이들을 다시 만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그들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바닷가에서 그들을 보시는데, 이 사람들은 주님인 줄을 알지 못합니다. 이윽고 주님이 이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 들리도록 큰 목소리로 말씀하시는데, 그 음성에 주님의 사랑이 묻어 있습니다. “얘들아”[파이디아!] 이 말은 부모나 선생님이 친근하게 어린이들을 부르는 말입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이 물음은 고기를 사려고 묻는 것이 아닙니다. 혹시라도 나도 고기잡이를 해도 될지 확인해보는 질문이 아닙니다. 낚시하는 사람들 곁을 지나갈 때 호기심 반 인사말 반으로 잘 잡히십니까? 하는 말은 더더욱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은 “어떠냐? 지금 너희에게 잡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지 않느냐?”하는 물음입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너희가 아무 것도 못 잡았느냐? 그렇지? 너희에게는 너희의 일이 있다. 그리고 그 일은 내가 없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나 없이 너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제자들은 아직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대답합니다 “없나이다.” 주님이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라 하십니다. 거기에 한마디 더 하시죠. “그리하면 잡으리라.” 이쯤이면 생각이 기민한 사람이라면 주님의 초기 사역 때에 제자들을 부르시던 장면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낯선 사람으로 보이지만, 그 분의 음성 속에 사랑과 자상함이 있고, 분명한 확신과 권위가 있습니다. 과거에 똑같이 겪었던 기적의 날과 너무도 똑같습니다. 그들이 순종하여 그물을 내립니다. 여기에 소망의 빛이 밝아옵니다.
사실 경험이 많은 어부는 낯선 사람의 지시를 받는 것이 유쾌하지 않습니다. 나름 전문가이기 때문입니다. 저 멀리 90미터 떨어져있는 곳에서 배 위에서 바닷속을 들여다 보고 있는 사람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말은 자존심 상할 일입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할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구하지도 않는 충고를 하지 마십시오.”라든지, 좀 더 격하다면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댁인 가던 길이나 가슈” 그런데 제자들이 이런 말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과거에 말했던 말,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라는 말도 하지 않습니다. 어떤 말도 필요치 않은 것입니다. 그저 이 권위 있는 말씀을 따라 마치 충성스런 군인과도 같이 말없이 복종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상했던 대로 기적이 일어납니다. 약 3년 전 경험했던 똑 같은 기적입니다. 어찌 된 일일까요? 지금 이 제자들, 포기한 자들을 깨워 일깨우시기 위한 것이 있으신 것입니다. 무엇일까요? 이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셔서 자신들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제 그들을 다시 일으키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 주님의 능력으로 말입니다.
그때 맨 처음 요한이 명민한 머리로 주님인 것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사랑하시는 제자”는 요한을 말합니다. 요한과 베드로는 성품상 차이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행동이 빨랐고 요한은 이해력이 빨랐던 성품입니다. 요한복음 20:3절 이하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무덤을 달려갑니다. 이들이 무덤에 도착했을 때 세마포와 머리 수건이 놓인 것을 봅니다. 요한은 바깥에서 보고 그것을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들어가지 않았다”고 기록합니다(5). 그런데 베드로는 그 속에 들어가서 세마포를 확인하고 수건을 다 확인합니다. 성품상 다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제자는 주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거의 함께 따라다녔고 함께 일하였습니다.
교회에는 은사가 다르고 성품이 다른 사람들이 어울려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귀한 일들을 이루어 가도록 했습니다. 베드로라는 행동의 사람과, 요한이라는 사색의 사람을 함께 일하도록 하십니다. 급한 성품의 아내와 느긋한 성품의 남편을 만나 부부가 되게 하십니다. 세상을 볼 줄 아는 사람들과 환상을 볼 줄 아는 사람이 서로 보완하며 주님의 일을 감당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주님이 세우신 교회의 신비가 있고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시다” 이 말을 듣고 베드로가 겉옷을 입고 바다에 뛰어내렸다고 했습니다. 역시 즉시로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뱃일을 하며 밤새껏 속옷 차림으로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기다리지 못하고 물 속으로 뛰어든 것입니다. 8절에 50칸이라고 번역된 거리는 200규빗, 약 90-100미터의 거리입니다. 아마도 그리 깊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주님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물로 뛰어들어 달려가는 사나이의 첨벙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우리의 귓전에 들립니다.
이들이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위해 조반을 준비해두셨습니다. 어느새 숯불 위에 생선과 떡이 놓여있었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12절에 쓰인 이 말씀을 우리는 이렇게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서들 오시게. 밤새 수고하느라 배고프지? 어서들 들게.> 누구도 주님을 보고 ‘당신은 누구냐’ 묻는 자가 “감히” 없었다고 말씀합니다. 아무 소리 없이, 아니 아무 소리도 못하고 짠물에 젖어 주저 앉았을 제자들을 향해 주님께서 따뜻한 모습으로 따뜻한 떡과 생선을 가져다 주셨다 성경은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떡과 생선. 이것을 받아 든 제자들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우리는 너무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기록된 떡과 생선 말입니다. 지금 그들이 앉아있는 저 너머, 디베랴 갈릴리 바다의 건너편이었습니다. 저 바다 너머에서 주님이 어린이가 드린 떡과 생선으로 오천명을 먹이시던 그 날 말입니다. 그 날의 기적 사건 후에 주님이 말씀하셨죠. “내가 생명의 떡이다” 그리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54이하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요 6: 54-57
주님이 절망한 이들의 생명을 회복하시는 것입니다. 요 14:6의 말씀처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아니고서는 그 무엇도 할 수 없음을 일깨우시고 이제 그들의 사명을 회복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말씀하시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에 걸쳐 물으시고 말씀하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여러분, 부활의 증거는 누구에게나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구별된 사람들, 주님이 사랑하시는 이들에게만 나타난 것입니다. 사도행전 11:39이하에서 말씀합니다.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행 11:39- 41 
부활의 주님이 모든 백성에게 나타나신 것은 아닌 것입니다. 오늘 나는 주님이 구별하여 선택하셨고, 부활하신 주님의 살아계신 은총 속에 있습니다. 그 분의 사랑을 먹고 양식을 먹고 생명을 먹습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내 인생 위에 살아 계시고 성령으로 함께 하고 계신 것입니다. 끊임없이 새롭게 하시고 회복시키시며 도우시는 것입니다.
고로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 인생의 실패가 있을 때 그 자리는 주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갈릴리로 돌아와 포기한 자들에게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둘째, 그 실패의 자리에서 낙심한 자에게 소망의 답을 주십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나를 떠나서는 네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을 알았느냐? 이제 다시금 내가 주는 양식을 먹고 힘을 내라. 셋째, 회복시켜 주님을 위해 쓰이는 인생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기력을 회복하였느냐?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을 알겠느냐? 나를 사랑한다 할 수 있겠느냐? 내 양을 먹이라. 주님이 주시는 소망의 아침, 베드로와 제자들의 그 경험이 오늘 우리들의 것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주님, 감사합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죽음에서 살아나 영광을 이루신 것처럼, 주님께서는 부활의 능력으로 저희에게 끝없는 용기와 소망을 주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깨닫듯, 우리는 주님을 떠납니다. 멀리합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습니다. 주님, 그때 그 자리에 찾아와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깨우치심을 봅니다. 영의 양식을 주시며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다시 깨닫게 하십니다. 이 사랑으로 인하여 부족한 입술이 주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붙들고 다시 일어섭니다. 주님, 저희 인생 주님 부르시는 날까지 강건케 하소서. 주님께서 마음껏 쓰실만한 믿음과 소망을 굳건케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부활의 수혜자들 김창운 목사 2017.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