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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의 수혜자들 (2017.04.23)
설교자     김창운 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누가복음 24장 25-35절
 
 
본문 내용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8.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Content



                        부활의 수혜자들 눅 24:25-35
때는 어둑 어둑 해지는 시각입니다. 계절은 봄날이 만연합니다만, 들꽃도 새들 소리도 관심이 없습니다. 이들의 발길은 무겁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 약 10킬로미터 되는 길을, 걸어서 걸어서 가는 두 행인의 표정에는 웃음기가 없습니다. 가장 큰 명절이라는 유월절을 예루살렘에서 지내고 돌아가는 이들 중 한 분은 글로바라는 분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그 곁에서 자리를 지키던 여인 중 한 분이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라고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글로바 하면 널리 알려진 이름입니다. 마치 이기풍 손양원 주기철, 이 어른들 성함이 낯설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 아내가 예수님을 열심히 따랐고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자리까지 임종을 지켰다면, 그 남편 글로바도 같은 시각 어디선가 십자가의 현장을 바라보며, 예수님을 쫓았던 사람임에 분명합니다. 열심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이 있고 꿈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저 메시야 예수님이 우리 민족 이스라엘을 위해 영광스런 일을 이루시리라!’ 주님이 <복 있는 사람>을 가르치실 때 8복에 해당되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이 사람이었습니다. 21절의 기록처럼, 우리 민족 ‘이스라엘의 속량’을 위한 꿈과 열심을 가지고 십자가까지 따라갔으니 존경할 만한 분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목 말랐던 만큼이나 실망이 컸습니다. 여러분, 혹시 낙심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꿈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노력했는데, 결과가 참담해서 주저 앉아 울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때로는 정의를 위해, 때로는 나라를 위해, 때로는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혹은 어떤 소중한 가치를 위해 갈망하며 땀 흘렸는데 뜻대로 되지 않아 답답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이 글로바와 또 한 사람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그토록 꿈꿔왔고, 믿었고, 열망을 가지고 따랐던 위대한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잠시 위대한 꿈을 꾸게 했던 그 분은 속절없이 십자가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혹시나 마음에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3일 동안 예루살렘에 머물렀습니다. 유대의 전통에는 나흘째 영혼이 떠난다고 했으니, 혹 3일 이내에 무슨 일이 있을까 해서입니다. 또 그 분이 살아계실 때 ‘사흘 만에, 사흘 만에’라는 말을 자주 언급 하셨기에 혹시나 하여 사흘을 기다려 보았습니다.
그런데 위대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대신 이해할 수 없는 말만 들립니다. 우리 그룹에 있던 여자들 몇이 그 분 무덤에 갔는데 시신은 없고 천사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 천사가 말하길 “예수님은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몇몇이 또 무덤에 가봤는데 시신도, 천사도 못보고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낙심과 궁금과 불안한 마음이 교차하는 중에 한숨 섞인 이야기를 나누며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라고 합니다.
집에 당도하려면 얼마나 남았을까요? 발걸음도 무겁고 마음도 무거운 이 일행에게 다가와 말을 거는 나그네가 있습니다. “무슨 이야길 그렇게 심각하게 나누는 중인가요?” 글로바가 갑작스런 길동무에게 핀잔하듯이 반문합니다. “아니, 보아하니 예루살렘에서 나와 집으로 가시는 모양인데, 아직 소식이 깜깜이오?” “그래 무슨 일인데요?”
이미 아셨겠지만, 이 분이 우리 주님입니다. 언제든 어떤 상황에서든 선하셨고 사랑이 가득하신 주님의 화법이 이것입니다. 물음이시죠. “너의 마음에 가진 것이 무엇이냐?” 이 글로바로 하여금 그 마음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만물의 구세주요, 모든 문제의 해답이 되시는 주님과의 대화로 초대하시는 사랑인 것입니다. 여러분, 낙심의 순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을 듯이 답답한 순간이 찾아왔을 때, 어둠의 늪에 머무르는 것은 결코 좋지 않습니다. 그 늪을 느낄 때 우리는 즉시 고개를 들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물으시며 우리를 듣고자 하시는 주님께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래 무슨 일이냐”이 음성 을 향해 말입니다.
글로바가 그 마음을 풀어놓습니다. 이 하소연은 네 가지입니다. 1. 나사렛 예수는 능력이 크신 선지자였습니다. 이 분의 말씀과 가르침은 하늘의 것이었고, 베푸신 모든 이적은 위대하고 영광스러웠습니다. 2. 우리 지도자가 이 분을 죽였습니다. 그들은 “우리 대제사장과 관리들”이었습니다. 십자가 판결은 로마 총독이 했지만, 엄연히 죄목을 씌워 고발한 것은 우리 대제사장들이요 관리들이었습니다. 3. 우리는 이 분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분으로 믿었습니다. 이 나라를 영광으로 인도하실 메시야,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리던 분 말입니다. 그러나 허무하게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4. 그런데 여인들이 말하길, 시신이 사라지고 천사가 말하기를 그 분이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몇몇이 또 가봤는데 시신이 없어진 것만 보고 왔습니다. 신앙적으로 논리적으로 합리적인 상식적으로는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털어놓고 있습니다.
글로바의 이야기를 듣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믿지 못하는 것을 지적하시면서 중요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26절)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는 것이 마땅한 것 아니냐 하시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일찍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율법서와 예언서의 말씀도 받았습니다. 메시야를 믿었고 갈망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믿고 기대하던 믿음의 골자는 영광과 승리였습니다. 메시야가 이뤄주실 영광! 거기에만 관심이 있었고, 고난 당하실 메시야에 대해서는 침묵했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가르친 이들이 고난의 과정에 대해 무지 했거나 무시한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양태이면서도 오늘 믿음의 사람들에게 교훈하시는 주님의 사랑 어린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영광이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성도 또한 고난의 과정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하기까지 실패한 횟수가 6천번이라고 합니다. 세상에서도 실패 없는 성공이란 없다고 말합니다. 믿음의 길에서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는 것입니다. 연단이 없는 성숙이란 없고, 훈련이 없는 성장이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만난 어려움의 시간이 있다면, 그것은 영광의 열매를 위해 가는 것임을 붙잡으셔야 합니다. 믿는 자들에게 이 이치는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활의 영광 이전에 고난의 십자가를 주셨지만, 그 십자가 너머에서 눈물어린 사랑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것을 성경 말씀을 들어 가르쳐주셨다고 했습니다. 창세기에서 신명기에 이르는 모세의 율법과 이사야에서 말라기에 이르는 선지서의 말씀들을 인용하시며 고난과 영광의 예표들을 증명해주신 것입니다. 성경은 그 내용들을 풍성하게 담고있습니다. 시편 22편과 이사야서 53장이 고난 받는 메시야를 담은 대표적인 말씀인데, 오늘은 창 3:15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는 죄를 저지릅니다. 하나님께서 그 죄를 짓도록 꾄 뱀에게 저주를 내리며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 3:15)
하와의 후손 즉 사람들을 뜻함과 동시에 여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이루실 에덴 회복의 주인공 메시야의 출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너는 원수가 될 것이다. 그가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즉, 너를 무찔러 죄로 인한 저주의 역사를 무너뜨릴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입니다.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 즉, 멸망과 죄의 주인공인 사탄으로 인해 ‘여자의 후손인 메시야가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이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시 118:22-23에서는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라고 말씀합니다. 버림받고 고난 당한 메시야를 말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 말씀을 인용하며 전합니다. 주님이 건축자에게 버려진 돌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돌이 건물 중에 가장 중요하고 영광스러운 머릿돌이 되었다고 말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한편 부러운 마음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을 풀어주신다! 얼마나 감격적인 일입니까? 성경의 주인공, 아니 말씀의 저자이신 주님이 직접 들려주시는, 저자 직강입니다. 얼마나 시원스럽고 확실하겠습니까?
32절을 보면 이 사람들이 말씀을 들을 때 가슴이 뜨거웠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입니다. 이 우주와 전역사를 소유하신 주인공이 이 조막만한 인생을 향해 풀어 말씀하시는 진리가 가슴을 채워갈 때 엉켜있던 실타래가 삽시간에 풀리면서 그 가슴이 생명의 뜨거움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득한 진리의 파편 중 하나만을 발견하고도 유레카(찾았다) 소리치며 벌거벗고 뛰며 기뻐하는데, 이 우주와 역사, 아니 천국에 가득한 비밀이 인생의 한계 속으로 꽤뚫고 들어오는데, 그 감동이 어떠했겠습니까? 주님이 말씀 하실 때 주님의 호흡 속에 살아계신 성령님이 그들에게 공기처럼 스며들 때 그 느낌 입니다. 부활하신 몸으로써 어떤 장벽도 시간도 초월적으로 움직이시는 주님의 신비로운 능력이 저 수억광년 떨어진 거리에서부터 일각에 번개처럼 저 가슴 속으로 쏟아져 채워질 때, 마치 감전된 사람처럼 뜨거워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성령체험이 그렇듯이 말입니다.
이들은 동행하는 이 나그네가 보통분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이 분은 가실 길로 더 가시고자 하시지만, 그들이 강권하여 집으로 모셨다고 했습니다. 복된 사람들입니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대낮 더위에 그 집 앞을 지나가는 하나님의 사자를 영접하여 복을 받았던 일을 떠오르게 합니다. 이 복이 마치 예고된 것이나 되는 듯, 주님을 집에 모시고 음식을 드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이 분이 떡을 가지사 축사하셨다고 했습니다. 떡을 들어 축복하시고 떼어 주셨다고 했습니다. 어디서 본 장면 같지 않습니까? 가난한 이들이 모여있는 저녁 들판에서, 오천 명을 먹이신 모습 말입니다. 유월절 마지막 만찬을 제자들과 드시던 주님의 모습 말입니다. 거룩한 성찬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이 사람들을 찾아오셔서 성찬의 떡을 주신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고 했습니다. 이적입니다. 치유입니다. 회복입니다. 재창조의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는 죽음으로 가는 자의 꾀임에 귀를 기울여 선악과를 먹습니다. 그때도 눈이 밝아졌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눈은 교만의 눈입니다. 불순종의 눈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죄악의 눈이 밝아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떡을 먹은 자는 영생의 눈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교만의 눈이 죽고 겸손의 눈이 밝아지고, 불순종의 눈은 사라지고 순종의 눈이 밝아지며, 죄악의 눈이 어두워지고 의의 눈이 밝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성찬은 바로 그런 영적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로마서 5:19이 말씀합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주님은 하나님이 주신 십자가의 고난을 순종하시고, 영광의 자리에 이르셨고, 또한 오늘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 의의 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성찬을 받아 그들의 눈이 밝아져 주님인 줄 알아보던 순간, 주님은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나셨습니다. 이건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하나님은 가실 수도 있고 오실 수도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33) 곧 그 때로 일어나(개역: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쉽게 읽고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이 자리에서 예루살렘까지 돌아간 것은 여기서 현충원 거리처럼 산책하는 거리가 아닙니다. 25릿길입니다. 이들은 조금 전 이 길을 걸어왔습니다. 방금 왔던 길을 또 간다는 게 쉬운 일입니까? 게다가 한밤 중입니다. 이제는 더 깊은 밤입니다. 손 전등이 있다고 해도, 불편합니다. 무엇보다 위험합니다. 그러나 돌아갑니다. 모든 불편과 귀찮은 조건이 이 사람들에게는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가슴이 뜨거워 이 소식을 다른 제자들에게 알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내일도 시간이 있잖아요? 오늘 이들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바로 저 낙심에 빠진 제자들을 위해 오늘 밤, 지금 전해야 했던 것입니다.  오는 길이 터덜터덜 걸어오는 발걸음이었다면, 이들은 분명 달리고 달리며 갔을 것임에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 밤에 예루살렘에 머물던 제자들을 만납니다. 34)에 보니 이 제자들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들도 주님을 만나고 말씀과 성찬의 경험을 간증합니다. 어떤 질문이 오갔을까요? 어떤 답변이 오갔을까요? 얼마나 부등켜 안고 울고울고 웃고 웃으며 감격했을까요? 이것이 부활의 능력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변화된 성도의 행적(行跡)인 것입니다.
앞에 이 분들이 부럽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만의 생각이 아닐 것입니다. 무엇이 부러운 것일까요? 이들에게는 주님이 친히 말씀을 풀어주실 때 가슴이 뜨거워지는 체험이 있어서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떡을 축사하여 떼어 주실 때 그들의 영의 눈이 밝아지는 체험이 있어서일 것입니다. 또한 그들의 뜨거운 감동을 통해 그 행실이 변화되는 체험이 있어서일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에도 부활하신 모습으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오셨습니다. 핵심적인 메시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마태복음의 마지막 절인 마 28:20에서 주님은 약속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우리의 인생은 내가 혼자 가는 길이 아닙니다. 주님이 동행하시고 함께 하시고, 선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앞길을 먼저 가시며 예비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의 삶에서 친히 우리가 주님을 향해 올리는 대접을 이렇게 받으시겠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 25:40).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을 모시고 살고자 하는 이에게 주시는 언약의 말씀인 것입니다.
주님은 다시 한번 우리에게 엠마오의 제자를 부러워 할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부활의 역사를 이루시고, 그 증인들을 모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주셨던 모든 것, 아니 그보다 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은총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탄생입니다. 교회를 통하여 주님은 엠마오의 제자들에게 주셨던 체험적 신앙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 첫째가 성경말씀입니다. 엠마오의 제자들에게 주님이 풀어주신 성경은 율법과 선지서를 대표로 하는 구약성경이었습니다. 주님은 신약의 시대를 여시고, 주님의 말씀들을 이 성경 속에 남겨주셔서 언제든 책을 열면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에게 말씀을 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열고 읽고 묵상하는 이마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역사가 있게 하신 것입니다. 둘째, 교회를 통하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성찬의 영적 능력을 이어가게 하셨습니다. 오늘도 우리들의 성찬은 우리의 영의 눈을 밝혀주며, 치유와 회복, 화평의 역사를 주님으로부터 얻으며 주님께서 주신 교회됨의 본질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셋째, 성령님을 주셨습니다. 가슴이 뜨겁도록 체험하며 깨닫게 하시고, 성찬으로 회복되게 하실 뿐 아니라, 변화되고 성장하는 믿음의 증거가 더할 수 있도록 주님의 영이 살아서 우리 속에 동행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이 두려우신 일 있으십니까? 낙심 되는 일 있으십니까? 두렵고 떨리는 중에 앞날을 계획하시는 일이 있습니까? 혹은 질병이나 아픔이나 과거의 악몽에 시달리는 일들이 있으십니까? 이제 찾아와 “그래 무슨 일이냐” 자상히 물으시는 주님께 아룁시다. 맡기십시다.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으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과 성찬에 임하시는 능력으로 영의 눈이 밝아져, 옛사람이 가졌던 교만의 눈이 사라져 겸손의 눈이, 불순종의 눈이 어두워지고 순종의 눈이, 죄의 눈이 꺼지고 의의 눈이 밝아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지금 천국에서 우리를 응원하고 계실 엠마오로 가던 믿음의 선배님들처럼, 주님이 주신 감동과 주님이 주신 사명 앞에는 어떤 것도 문제가 아니어서,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위해 “곧 그 때로 일어나는” 믿음의 증거가 더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통하여 교회를 세우시고, 말씀과 성찬과 성령님의 능력이 저희 것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엠마오의 두 분 제자처럼, 저희도 주님께서 주신 은혜를 입어, 교회를 통하여 가슴이 뜨거워지는 체험이 있게 하시고, 영의 눈이 점점 더 밝아지는 은총을 주시며, 성령의 역사가 우리의 마음과 행실을 움직이는 역사가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부활 사건의 증거 김창운 목사 2017.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