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벧엘방송 > 주일설교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 (2017.04.09)
설교자     김창운 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누가복음 19장 29-40절
 
 
본문 내용
29.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30.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1.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33.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34.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37.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Content


                   눅 19:29-40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
오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그래서 부활절을 한 주 앞둔 오늘을 종려주일이라고 합니다. 고난 주간이 시작되는 첫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어주신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며 함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의 심령은 그 옛날 예루살렘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주님을 환영하였던 것처럼 주님을 환영하며 찬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예배당에 주님을 모시는 심정의 찬미입니다. 우리 벧엘교회를 향해 주님께서 영광으로 입성하시도록 정성을 다하여 모시는 노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24편의 7-10절의 노래는 우리가 오늘 부르기에 합당합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시 24:7-10)
이 시는 다윗 왕이 여호와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면서 예루살렘 성문을 향해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성으로 여호와께서 들어가시므로 ‘예루살렘의 성문들이여 활짝 열릴지어다!’” 하고 말입니다. 종려주일의 정신은 바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성전으로 모시는 것이요, 우리 인생의 주인 되어주시기를 간구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오늘 그런 소원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던 모습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이 이야기는 상황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보다 깊은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누가복음의 본문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근처에 당도한 것으로 시작합니다. 누가복음 17장 1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하셨다고 했습니다.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셔야 했다고 알려줍니다. 18장 35절에서 보면 여리고를 향해 가셨고 19장에서는 여리고에 들어가시고 삭개오를 만나 그 집에 머무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나와 이제 예루살렘 동쪽 감람산 인근에 있는 마을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셨다고 했습니다. 즉 지금 예루살렘을 목적지로 두고 걸어오셨고 예루살렘에 도착하셔서 이제 중대한 목적을 이루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갈릴리에서 사마리아와 여리고를 거치고 예루살렘까지 오는 여정에서 예수님은 많은 기적과 가르침과 영광스러운 이적들을 보여주셨습니다. 17장에서는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 한 마을에서 나병에 걸린 환자 열명을 고쳐주신 사건이 있었습니다. 여리고로 들어가실 때는 시각 장애인 한 사람을 만나서 고쳐주셨습니다. 여리고 성에 들어가서는 세리 삭개오의 인생을 변화시켜주셨습니다. 그리고 유명한 열 므나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기 위해 먼 나라를 다녀오면서 종 열명을 부릅니다. 열 개의 은화를 나누어주면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이 돈으로 장사하라고 했습니다. 한 종은 한 므나로 열배를 남기고, 어떤 종은 다섯 므나를 남겼습니다. 왕이 되어 돌아온 주인이 칭찬하며 말합니다. 열개 를 남긴 자에게 열 개의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다섯 개를 남긴 자는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십니다. 한 므나를 도로 가져온 종은 주인에게 말합니다. “당신은 엄한 분이라 두지 않은 것도 얻고 심지 않은 것도 얻을 수 있는 분이기에 제가 그대로 두었다가 가져왔습니다.” 왕이 이 사람을 향해 악한 자라고 말하며 <그 있는 것도 빼앗아 열 므나를 가진 자에게 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의미심장한 이 말씀을 비유로 들려주시고, 예루살렘으로 가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초입이라 할 수 있는 감람원산에 도착하자 주님은 제자 두 사람에게 말합니다.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거기에 가면 아무도 타지 않았던 나귀 새끼가 매여있을 것이다. 그것을 보면 풀어서 끌고 오라.  만일 누군가 묻기를 ‘어찌해서 이 나귀를 푸는 거요’ 라고 물으면, ‘주께서 쓰시겠다” 말하라.
과연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나귀 새끼를 보았고 그 맨 것을 풀자 임자가 묻습니다.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는 거지요?” 그러자 주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답합니다.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이야기는 신비롭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논리적 이성으로는 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하긴 우리 같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고 구원의 은혜를 얻은 것부터가 신비로운 일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심이 우리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신비요, 그 아들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신 사실이 신앙을 가진 우리조차 다 이해할 수 없는 영원한 신비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 나귀 새끼의 주인을 아셨을까요? 이 사람들은 누군가 나귀 새끼를 풀러 오고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면 선선히 내어주도록 각본으로 짜여 있었던 것일까요?
주님은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인격뿐 아니라 하나님으로서 오셨습니다. 눅 19장 41절에는 예루살렘 성을 가까이 오셔서 그 성을 보시며 우셨다고 했습니다. 죽음으로 향해 가는 인간과 역사의 실체를 보며 불쌍하다 못해 고통 하시는 모습입니다. 또한 주님은 신비적 예지라고 하는 신적 능력을 지니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유월절 만찬을 먹기 위해 준비하실 때도 이렇게 하셨습니다. “보라 너희가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가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이 네게 하는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그리하면 그가 자리를 마련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준비하라 하시니 그들이 나가 그 하신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준비하니라(눅 22:10-13
 
성경은 이런 구절이 많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나다나엘을 처음 만나는 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요 1:47-48)
마태복음에서는 성전세를 받는 사람들이 예수님와 베드로에게 왜 성전세 반 세겔을 내지 않느냐 묻자 베드로에게 한가지 주문을 하십니다.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해,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라. 먼저 떠오르는 고기에 입을 열면 한 세겔이 있을 것이다. 너와 내 몫이니 가져다가 내라.” 마 17:24-27
주님은 인간으로 오셨고, 또한 하나님으로서 초자연적 능력을 갖고 계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2: 24-25절은 말합니다.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요 2:24-25)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 “주”란 말이 그 사람을 녹인 것입니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의 신비와 이 사람의 “주가 쓰신단다”는 말 한마디에 내어놓는 순수한 믿음이 만나는 신비인 것입니다. 누가는 이것을 조금도 스스럼 없이 그것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지금 대단히 극적인 순간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얻은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성인의 체구로 나귀 새끼를 탄 것은 결코 볼품 있는 자세가 아닙니다. 거의 걸친 것이겠죠. 그러나 주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가실 때 제자의 온 무리들이 환영 인파로 몰려들었습니다.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겉옷을 깔아드렸고 호산나 호산나를 열호하고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나귀 새끼를 타신 주님과 군중들의 환호, 어정쩡한 이 광경은 분명 모순적이면서도 신비로운 의미를 담아놓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성경이 증거하는 세가지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말씀의 성취를 보여줍니다. 스가랴 9:9절은 종려주일마다 묵상하게 되는 말씀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주님의 관심은 언제나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있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은 주님께서 기도하시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문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눅 22:42). 이제 다가오는 조롱과 고난의 시간 앞에서 고통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주님께도 있었습니다. 다만, 주님의 선택은 언제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으며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스가랴서 9:9의 예언처럼, 그는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셨습니다. 나귀의 작은 새끼를 타심이 예언된 대로- 그 옹색하고 초라한 예표의 완성을 부끄러워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말씀 속에 메시야의 예표들이 예수님으로 완성되는 것을 바라볼 때마다 성경의 깊이가 얼마나 놀라운지 깨닫습니다. 마태복음 5:17은 말합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겸손하신 주님은 율법의 완성을 이루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말씀의 완성입니다. 이것은 단지 성경책에 나온 예언의 사건들 뿐 아니라, 우리들 인생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 완성되는 것을 뜻합니다. 무너진 창조 세계의 회복이요, 깨어진 에덴의 재완성입니다. 죄의 권세들이 깨뜨려버린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의 회복이요 사랑의 완성인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신구약의 말씀을 성취하십니다. 그 주님이 우리의 주인이심으로 인해 오늘도 우리는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둘째, 평화의 주님을 보여줍니다. 나귀의 모양을 연상해보시겠습니까? 우리 동요에 <아버지는 나귀 타고 장에 가시고> 했듯이 나귀는 장에 갈 때 평온한 날에 짐 싣고 사람 싣고 유유자적 걸어 다니는 짐승입니다. 우직하고 충성스런 면이 있습니다만, 누구도 나귀를 위용 있고 권세 있는 동물로 보지 않습니다. 나귀는 결코 전쟁의 참혹한 자리와는 어울리는 짐승이 아닙니다. 고대 시대에 육상의 전장에서 가장 활용도가 높았던 동물은 나귀가 아니라 말이었습니다. 위용과 압제를 자랑하는 장수로 오신 것이 아니라 평화의 왕으로 오신 주님의 상징인 것입니다.
스가랴서 9:10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주께서 전쟁의 사슬을 끊고 이방에 이르기까지 평화의 소식을 전할 것이라 합니다. 이 바다에서 저 바다에 이르도록 무력의 왕이 아니라 화평을 선포하는 왕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몰려온 제자들이 부르는 찬양이 있습니다. 38절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탄생하실 때 천사들이 목자들 앞에서 찬양한 것을 기억하십니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당시 천사들이 땅 위의 평화를 노래하였듯이 이제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오셨고 하늘의 평화 또한 이루신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어떤 역사에도 없었고 어떤 인생에도 없었습니다. 어딘가, 누군가, 무엇을 갖게 되면 누릴 수 있을 것 같지만, 유감스럽게도 거기에도 없습니다. 땅의 방법으로는 말입니다. 지금 주님을 따르는 무리들과 제자들이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마침내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이요, 그 나라가 예수님에 의해서 성취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주님의 생각과 다릅니다. 그들은 땅의 생각에 머물러 주님의 평화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주님의 방법을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이들의 찬양은 옳습니다만 이 찬양의 의미는 다 알지 못합니다.
이 자리에서 바리새인은 이런 찬양을 하지 못하도록 책망하라고 예수님을 채근합니다. 이 바리새인들이야말로 주님의 뜻에 반대되는 자임에 틀림없지만, 지금 정치적이고 지상적인 메시야를 기대하고 있는 이들 또한 주님의 길을 알지 못했습니다. 입술로는 평화를 외치지만, 무력과 혁명으로 이루는 평화를 외치며 노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후에 주님의 모습을 누가는 냉철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9:41에 보면 주님께서 성을 보시고 우셨다고 말입니다. 주님은 알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환호하며 영접하는 저들 또한 주님을 온전히 알지 못하며, 결국 몇 일 후에는 유대 지도자들의 충동을 받아, “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하고 외칠 것을 말입니다. 42)에서 주님은 말씀합니다.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여기에 인간의 실존이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 인간 됨 본연의 모습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칭의를 받았음에도 여전히 연약한 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 본연의 모습에 대한 허무함의 인정은 절망의 이야기로 멈추지 않습니다. 왜요? 주님이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셋째, 주님을 찬양할 이유입니다.
셋째, 승리의 왕으로 오신 주님이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모든 것을 이기시고 모든 것을 해결하시며, 우리와 역사의 질문들을 해답하시는 분입니다. 모든 것들을 이기시고 승리의 왕으로 오시는 것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보여주신 공식적 퍼레이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를 선포하는 시위입니다. 주님께서 메시야로 오셨다는 선포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모든 인생과 역사를 품은 승리의 행진이었던 것입니다. 저 거대한 군중들은 다 알지 못하고 있지만, 주님은 그 모든 것을 품고 공식적 선포를 하십니다. 이 행진을 위험스럽게 바라보며 야단하는 바리새인들, 서기관, 대제사장들을 알고 계심에도 묵묵히 선포하시는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 속에는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하는 말 한마디에 선선히 나귀를 내어주던 <주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였던 익명의 고요한 신자>에 대한 고마운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입을 모아 부르는 “호산나 호산나” 소리에 사랑의 미소도 있었을 것입니다. 저 버려진 땅 사마리아에서 누구에게도 곁을 줄 수 없었던 우물가의 여인도, 오늘 저 아프리카 작은 마을에서 단 천원이 없어 죽어가는 두 살짜리 유아의 울음 소리와 그 어미의 통곡도, 오늘 이 예배의 자리에서 남들에게는 다 말할 수 없는 아픔과 부끄러움, 간절한 소원들도 다 품고 승리를 선포하시며 행진하시는 것입니다.
그 크신 품으로 묵묵히, 세상에 가득한 죄로 인해 우실지언정 미워하지 않으시고, 저 십자가의 길이 두려울지언정 포기하지 않으시고 가시는 것입니다. 마침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은 가장 먼저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성전의 회복이요, 동시에 죽음의 길을 자초하시는 것입니다. 스스로 죽기로 작정을 하셨으니 모든 사건과 정황들은 십자가 죽음의 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 조차 아시고, 품으시고 그대로 죽음을 당하기 위해 알고도 가시는 것입니다.
모든 타락의 역사와 전쟁의 피비린내와 불평등과 억압의 현장들,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되는 부조리의 현장… 우리들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한숨 짓는 그 모든 모순덩어리들을 짊어지셨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이런 것도 못하십니까?” 반항스러운 우리들의 투정 조차 품고 품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은 어찌 해야 할까요? 울어야 할까요? 우리의 죄가 너무 커서 주님의 사랑이 너무 커서 참회의 눈물을 흘려야 하지 않을까요? 그럼에도 오늘 주님은 우리를 찬양으로 인도하십니다. 주님의 그 큰 사랑에 비하면 비할 수 없이 작고 모순된 우리의 인생이지만, 그 모든 것을 품으시고 세상 모든 죄악을 무찌르시며 승리의 왕으로 오시는 주님을 찬양하며 영접하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의 노래처럼 말입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너희 영혼의 문들아, 닫혔던 문들아, 녹슬었던 문들아, 죄로 얼룩졌던 문들아, 열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오신다. 호산나 호산나 호산나! “구원의 주여 오시옵소서. 승리의 주여 오시옵소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 찬양이 우리의 것이 되어 주님께 영광을 돌릴 때, 주님의 임재가 우리 속에 가득함으로 그 사랑에 대한 감사와 기쁨이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기도) 사랑하는 주님, 주님의 은혜만이 저희를 살리십니다. 승리의 왕으로 오시는 주님, 주님의 승리가 저희를 살리셨음으로 인해 감사를 드립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주님, 오늘 예배하는 이들의 모든 가정마다 평화로 임하시고, 영혼들마다 하늘의 평화로 채워주시옵소서. 우리 교회에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 무엇보다 우리가 사랑하는 조국 땅에 주님의 평화로 임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의 성취로 오신 주님,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성취되길 소망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주님을 통하여 이루어졌으므로, 주님 안에 살아가는 저희들 속에서도 말씀의 성취들이 나날이 나타나게 하옵소서. 주님의 나라가 우리 가정과 인생 위에 영원히 머무는 빛의 형체들이 날마다 더 밝아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나님으로의 초대자, 예수 김창운 목사 2017.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