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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으로의 초대자, 예수 (2017.04.02)
설교자     김창운 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마가복음 1장 16-20절
 
 
본문 내용
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Content

                        막 1:16-20 "하나님으로의 초대자, 예수"
봄은 참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추웠던 겨울이 언제 있었냐는 듯이 개나리 목련 산수유가 공원과 거리들 한 켠에서 그 모습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꽃들의 향연 속에서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 만물의 아름다움과 생명이 살아있는 힘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삶의 자리가 고단하여 꽃이 만발한 새 봄이지만 막막하고 답답한 가슴을 안고 오신 분이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또 이 시기는 사순절이기에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경험 속에 있는 분도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이 모든 분들을 위해서 이 봄에 떠오르는 시가 하나 있습니다. 정호성 시인의 “길”이라는 시입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과연 우리 주님은 절망으로 끝나는 길의 끝에서 길이 되시는 분입니다. 인류의 생명이 죽음으로 끝나는 자리에 길이 되어 오셨습니다. 생명의 길을 내시기 위해 스스로 봄길 같은 소망의 길을 여시며 걸어가셨습니다.
그 길을 성경은 기쁜 소식이라 부릅니다. 복음입니다. 길이 열린 기쁜 소식 말입니다. 절망의 길 끝에 있는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기쁜 소식을 만드시고, 기쁜 소식이 되어 오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이전에 선지자로 왔던 분이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이 분의 소식은 기쁜 소식이라 하기에는 모자람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3:10에서 세례 요한이 선포하기를,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고,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마다 찍혀서 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기쁨의 메시지라기보다 심판과 경고의 메시지였습니다.
반면에 주님이 오시던 날 목자들이 밤을 새워 양떼를 지키고 있을 때 주님의 천사가 전해온 소식은 “기쁜 소식”(눅 2:10)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마가복음 첫 시작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오셨다고 했습니다(눅4:28하). 주님은 공생애 동안 회당에서 들에서, 마을과 도시에서, 성전에서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마 4:23). 마가복음에서 주님의 첫 설교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4-15)는 것이었습니다.
왜 기쁜 소식이라고 했을까요?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에는 기쁨의 반대, 슬픔과 절망의 소식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희망을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성민이라고 하는 유대교의 믿음 속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믿은 하나님은 사람들과는 한 없이 먼 거리에 있는 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이 거룩이라는 말, ‘카도쉬’는 분리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과 떨어져 있고, 죄로 물든 세상과는 구별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로 타락한 인간과는 본질적으로 멀리 있는 분으로만 믿어졌습니다.  ‘절대 타자’였던 것입니다. 접근할 수 없는 하나님이요, 예측할 수 없는 분이요, 인간의 사고로는 그 분의 뜻과 계획을 결코 헤아릴 수 없는 분인 것입니다. 특히 죄인은 범접할 수 조차 없는 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인을 멸망시켜서야 세상을 깨끗하게 하는 분으로 믿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시긴 했지만 죄로 물든 세상에 대해서는 어떠한 책임도 연관도 없는 분으로 여겨졌고,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과는 원수처럼 멀어진 존재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절대타자이신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인간을 위한 이타적 하나님으로 오신 것이었습니다. 인간을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인간의 슬픔을 그 마음에 안고, 그 자신을 인간에게 내어주시는 분으로 오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바로 그런 하나님으로 오신 주님이 갈릴리 해변에 지나시다 시몬과 안드레를 부르시는 모습을 봅니다. 조금 더 가시다가 인근에 있던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도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그 부르심은 단순하였습니다. “오라”는 말씀입니다. 영어로는 “Come!”입니다. 이것은 초대였습니다. 하나님의 등장이요, 하나님 성품의 소개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참된 성품으로 초대하시고자 오신 것이었습니다. 이 초대에 담긴 세가지 뜻을 생각해 봅시다.
첫째는 “초대하시는 하나님”으로의 초대입니다. “오라” 하시는 말씀은 사람을 초대하는 말입니다. 예수님 당신이 초대자가 되셨는데,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초대하심의 성품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언제든 어디서든 하나님께 나오도록 초대하시는 그 하나님으로 초대하시는 음성이었던 것입니다.
마 11:28에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 와서 쉬라고 초대하십니다. 마태복음 22장의 비유에서 천국은 혼인 잔치를 열어놓고 사람들을 부르는 초대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22:4). 마태복음 25장에서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성도들은 예비된 영광의 자리에 참여하도록 초대받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25:34). 주님의 말씀에는 초대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초대하시는 하나님으로의 초대인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를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그 초대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 생활 중에 순박한 분들의 기도를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허리가 굽고 지팡이를 짚으신 권사님 한 분을 본 기억이 제게 있습니다. 교회의 가파른 계단을 지팡이를 짚고 한걸음 한걸음 올라와 교회 건물 돌벽에 손을 짚고 가쁜 숨을 몰아 쉬면서 기도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북 분이셨습니다. <아바디. 내레 이제 아바지 집에 왔시요> 아마도 그간 병치레를 하셨든 어디 다녀 오셨든 한동안 교회를 못나오셨던 분임에 틀림 없습니다. 교회로 나온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교회 역사 속에는 이런 기도의 어머니들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예배당에 앉아서 두런두런 기도를 하시다가 숨을 몰아 쉬고, 또 한참 기도하시다가 가만이 계시던 모습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이야기하고 듣고..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기도인 것입니다. 초대와 응답의 아름다운 만남이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주님이 운명하시던 순간에 이루어진 중요한 사건을 공통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은 휘장이 찢어진 일입니다. 오로지 일년에 단 하루, 대속죄일에만 오로지 한 사람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던 지성소였습니다. 그 대제사장도 죄가 있으면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죽게 된다는 것이 유대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휘장의 찢어진 사건은 바로 더 이상 장애물 없이 하나님께로 가까이 갈 수 있다는 초대장이었던 것입니다.
이 초대는 초대의 자격 구분이 없습니다. 신앙의 연조가 몇 대에 이르는 가문의 자손이라야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사회적 신분이나 도덕적 수준이나, 의롭고 공덕 있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5:32에서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고자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마 18장에는 주님이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서 왔다고 했습니다(마 18:11). 의인이라는 탈을 쓰고 공덕을 자랑하는 자를 무시하셨고,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 기쁨이 있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눅 15:7,10). 오늘 우리는 유대인들의 생각처럼, 우리의 죄가 두려워 하나님이 계시는 지성소로 나가기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초대하시는 그 사랑, 용서의 사랑으로 초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몇 주 전 뉴스 방송에서 세상을 웃긴 장면이 있었습니다. 미국 출신의 한 교수가 영국의 권위 있는 방송 BBC뉴스에 나와 인터뷰를 받는 중이었는데, 생방송 중에 아이들이 들어온 것입니다. 한 여자애가 춤을 추면서 들어와서 아빠 옆에서 놀았습니다. 그러자 그 동생이 보행기를 타고 덩달아 들어왔습니다. 엄마가 달려들어와서 아이들을 끌고 나갔는데, 생방송중이라 이 에피소드가 방송으로 다 나갔습니다. 이 천진한 아이들이 그 곳에 들어온 이유 하나는, 아빠가 거기 있으니까. 그 뿐이었습니다.
주님은 마치 이들 어린아이와 같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초청에 믿음을 가지고 나오도록 초대하신 것입니다. 그 사랑을 입은 우리가 오늘로부터 그 발걸음이 영원하신 초대를 향해 발걸음이 늘 향해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주님은 하나님을 죄인을 향해 찾아오시는 하나님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초대는 용서와 사랑 뿐만 아니라, 친히 사람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갈릴리 해변에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의 자리로 주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막 2:17에서 주님은 이렇게 당신을 소개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예수님에게 있어서 죄인이란 경멸이나 미움의 대상이 아니라 동정의 대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돌아올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라, 그를 위해 찾아 나서서 돌아오도록 호소하시는 분인 것입니다.
바리새인 율법학자 제사장들은 전염병 환자들과 죄인들을 피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레위인도 제사장도 강도 만난 자를 피한 이유를 변명한다면, 그들이 자칫 불결한 시신에 몸을 닿아서 정결법을 위배할까 하는 마음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율법을 그릇 해석한 그들의 한계였습니다. 주님은 죄인을 피한 것이 아니라, 찾아 다녔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절에는 죄인들과 세리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몰려들었다고 했습니다. 잃어버린 아들,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려고 죄인과 세리들이 몰려온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성경 어디에서도, 탈무드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죄의 문제를 가볍게 여기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죄인들에게 위로를 주며 회개하도록 하셨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목자의 심정으로 주님의 사랑의 갈급함을 전하셨습니다. 잃어버린 동전을 찾고 또 찾는 여인의 심정처럼 그 사랑으로 죄인을 찾고 또 찾으시는 사랑인 것입니다. 한 마리의 양을 잃어버렸을 때 아흔아홉 마리의 양으로 만족할 수 없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동전 하나를 잃어버렸을 때 아홉 개의 남은 동전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주님의 심정인 것입니다. 욕심 많은 주님이라는 뜻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를 찾고 또 찾으시는 분인 것을 말합니다.
출애굽기 33:17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하신 말씀입니다. 이사야서 45:3에서 “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 말씀합니다.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시며 내 이름의 인격을, 나의 존재를 소중히 여기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폴 튜니어라는 독일의 유명한 정신의학자는 그를 찾아온 한 소녀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 아이는 가족의 많은 집안의 막내였습니다. 그 아버지는 아이들을 기르는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아버지가 무심코 아이를 가리키면서 절망적으로 중얼거리는 말을 아이가 들었습니다. 그 말은 “저 애만 없었어도 이렇게 살기 힘들지는 않았을텐데… ”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이 아이가 큰 상처를 입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결코 이런 말씀을 하는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수가 많아서 하나님이 내 이름을 모르시지 않습니다. 어거스틴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 중에 단 한 명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 각 사람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천명 만 명이 되어도 단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으시는 분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12:6절에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참새 다섯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중의 하나라도 하나님께서 잊어버리지 아니하신다”고 말입니다. 본래 이 참새는 두 마리에 동전 한닢 값입니다. 그런데 시장에서 그렇듯이 두닢을 주면 네 마리가 아니라 다섯 마리를 줍니다. 하나를 덤으로 더 준다는 말입니다. 마치 그렇게 무가치한 덤처럼 취급되는 참새 같지만, 결코 하나님은 그 한 마리 조차 잊어버시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사람이 돈보다 못하게 여겨지고, 사람이 기계처럼 여겨지는 세상이라고 해도,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시고,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시며, 우리를 찾으시는 사랑인 것입니다. 오늘 나의 이름 부르시며 찾으시는 그 음성 앞에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 김창운이 여기 있습니다.” 응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세 번째, 주님의 초대는 한걸음 더 나아가 나를 필요로 하시는 하나님으로의 초대입니다. 제자들을 찾아와, 오라 부르시는 주님은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다른 말로 하자면, “오라, 나의 새 생명의 사역에, 하나님 나라 완성의 사역에 함께 가자.” 하는 것입니다. 주님 혼자 가시면 안되셨을까요? 홀로 천국을 이룩하실 능력이 없으셨던 것일까요? 모든 것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냥 알아서 다 하시면 되지 무슨 저 연약하고 변덕스런 인간들을 부르시는 것일까요?
윌리엄 캐리라는 분은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선교사입니다. 이 분은 세계 선교에 무관심하던 18세기 영국에 선교 운동을 일으킨 분입니다. 23살에 쿡(Cook) 선장이 쓴 “마지막 항해”라는 책을 읽고,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죽어간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 책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 그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응답하는 기도를 올립니다. 그리고 세계 선교를 위해 기도하며 교회에 선교의 필요성에 대해서 역설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던 한 분이 말했다고 합니다. “여보게 젊은이. 앉게나. 하나님께서 이방인 선교를 원하시면 자네나 내가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걸세.” 소위 극단적인 칼빈주의가 영국교회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격성을 몰랐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무지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케리는 7년간의 노력 끝에 결국 선교회를 설립하여 인도에서 선교를 하게 됩니다.
사람의 생각과 판단은 하나님의 인격적 성품을 왜곡하고 제한할 수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후에 그 창조의 세계 속에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 속으로 인간을 만들어 세우시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다스리는 일을 사람과 더불어 운영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홀로 고립되신 하나님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대화하시고 친교 하시며 동역 하시는 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끊임없이 사람을 초대하시고, 찾으시고, 또 더불어 일하시도록 사람을 필요로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창세로부터 동일하신 하나님의 성품은 오늘 하나님 나라의 회복과 완성을 위해서 동일하신 성품으로 사람을 필요로 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성품이 자녀에게 이어지고. 아버지의 유업이 자녀에게 물려지듯이, 하나님의 성품은 우리를 아들과 딸로 삼으시며, 그 유업을 물려주시고 더불어 이루고자 하시는 분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그 사랑, 그 부르심, 그 초대를 믿는 것, 그리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소망 유치원 잔치에서 아이들이 노래하고 발표하는 것을 보면서 아빠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아예 엄마들보다 더 난리를 칩니다. 하긴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 아빠에게 아버님이라고 부르는 아이는 없을 것입니다. 아버지란 말보다 더 친근한 아빠란 말을 잘 아십니다. 영어에서도 father 라는 말보다 더 친근히 Daddy라고 부릅니다.
자녀를 그토록 사랑하는 아빠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초대하시고, 우리를 찾으시고, 우리를 필요로 하시는 하나님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가르쳐 주시며 그 아버지께로 초대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바로 그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사랑에 수긍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믿으며, 불러 보는 것입니다. “아빠”라고 말입니다. 수줍게라도 좋습니다. 작은 음성이라도 좋습니다. 쑥스러우면 아무도 안볼 때 조용히 읊조려도 좋습니다. 입술을 열어 아빠를 부를 때 유치원생 아빠처럼 춤을 추며 반겨 안으실 하나님, 그 초대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에게 본래 주셨던 창세 때의 복, 다시 주시며 주님의 원하시는 그 일에 복된 인생으로 쓰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인생에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있겠습니까?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를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주님을 통하여 봅니다.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성품 속의 초대하심과 찾으심과 우리를 필요로 하시는 사랑을 깨닫습니다. 이 사랑으로 저희의 염려와 근심이 녹아지게 하시고, 이 사랑으로 세상에서 살아가는 영적 의미를 깨닫고 누리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오늘도 저희들의 입술에서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는 음성을 들으실 때 춤추며 기뻐하실 아버지를 믿사오니, 주님 온 믿음의 사람들 위에 위로와 용기와 소망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위대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꿈 속에서 살아가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김창운 목사 2017.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