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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2017.03.26)
설교자     김창운 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요한복음 1장 14-17절
 
 
본문 내용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Content


                                  요 1: 14-17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사실은 하나님의 영광이 인류의 혈통 속으로 오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외아들이 그 하나님의 영광을 품고 들어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심의 사건, 여기로부터 오늘의 말씀은 시작됩니다.
창세기 3:8 이하의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아담아 어디 있느냐,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부르면서 찾으시는 장면입니다. 그 동산은 하나님께서 사람과 만나는 동산이요, 교제하는 동산이요, 하나님의 영광에 사람이 함께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의 교제가 그칩니다. 죄로 인해 영광스런 친교의 관계가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거대한 협곡과도 같이 하나님과 떨어져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누군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마치 총탄과 포탄이 쏟아지고 있는 전쟁 중에 버려진 고아처럼 어떤 희망도 찾아볼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길을 여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하나님께서 사람과 만나는 교제의 장소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입니다. 골로새서 2:9은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주님 안에 하나님의 신성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말씀이 ‘인간’이 되어 오셨다”라 하지 않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본성과 삶을 취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겉모습이나 사람이라는 명목적인 개념만을 가지셨다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체를 취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약함, 우리가 가진 고통, 우리가 가진 죽음 조차도 취하여서 육신이 되신 것입니다. 아담이 하와를 사랑하여 말했던 것처럼, 주님은 우리의 뼈 중에 뼈가 되셨고, 살 중의 살이 되신 것입니다. 히 2:14는 증거합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셨다고 말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심은 하나님의 내주하심, “영광이 친히 오심”의 탁월함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 속으로 들어와 사람의 문화와 역사에 들어와 사셨을 뿐 아니라, 인간과 친히 결합하신 사건인 것입니다.
사실 이전 역사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성막을 통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시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을 짓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 백성 중에 머무시고자 한 것입니다. 성막의 내부는 귀한 나무와 정금으로 만든 기구들이 있었습니다. 지성소에는 법궤가 있었습니다. 법궤 위 그룹 날개 사이에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렀습니다. 민수기 9:15에는 그 영광스런 성막 위로 구름이 덮었고, 저녁에는 불 모양으로 나타나서 아침까지 이르렀다고 기록됩니다. 하나님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이스라엘 백성들 위에 영광으로 임하신 것이었습니다. 구름기둥은 광야에 타는 듯한 태양의 열기를 가려주고 뜨거운 모래를 식도록 해주었습니다. 불기둥은 급격히 기온이 떨어지는 광야에서 진영을 밝혀주고 따뜻하게 해주는 빛이었습니다. 시편 121편에서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시121:6) 하신 말씀이 그것을 말합니다.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 집사님은 이때 이스라엘을 광야교회라고 했습니다. 성막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님 백성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고후 6:16에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신 것처럼, 광야길에 하나님께서 임재 하신 이스라엘 공동체 모임은 광야의 교회였고, 오늘날 교회의 모형(母型)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형은 끝났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이스라엘 한 민족에게 제한된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이사야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온 땅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54:5)이라고 말입니다. 우리 주님이 수가성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에게 찾아와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 4:21)…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요4:23). 광야 교회는 모형이었습니다. 그림자인 것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거처 안에 거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훨씬 더 가까이 오셨다는 뜻입니다. 성육신이란 과거 이스라엘의 성막 안에 거하실 때보다 더 완전하게, 육신으로 몸을 입고 가장 가까이 오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18의 기록처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품 속에 있는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을 나타내어 오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은 아론 가문의 제사장만이 성소에서 볼 수 있었지만, 이제는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말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우리는 독생자의 오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 영광은 “은혜와 진리가 가득하더라” 말씀합니다. 독생자의 인격은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였고, 주님은 그 인격으로 우리를 만나기 위해 오셨고, 영광의 참여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오늘 이 세가지를 나누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 주님은 은혜로 충만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 분은 영광을 이미 지니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속성이 본래 은혜로운 영광이었기 때문입니다. 출34:6에서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모세 앞을 지나가시며 말씀합니다.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우리 주님의 영광은 아버지의 영광과 같은 성품인 것입니다. 즉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와 진실이 충만하신 분인 것입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주님은 은혜에 대해 가르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고. 은혜에 대한 이미지를 주시기 위해 오신 것도 아니라, 은혜를 직접 인격과 삶과 사역 속에서 보여주시기 위해 오신 사실입니다. 주님 자신의 인격과 속성이 무한대로 가득한 은혜의 빛을 지니셨으므로 그 충만하신 은혜를 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주님의 삶이 그것을 증거합니다. 그 분의 말씀에 은혜가 가득하였습니다. 그 분의 대화는 사랑의 대화였습니다. 사람들을 만나고 만지시고 고치시는 모든 사건들은 선하신 그 분의 영광, 은혜의 증거들이었습니다.
눅7장에서 주님은 나인성이란 곳에서 아들을 먼저 잃은 홀어머니를 봅니다. 아이를 잃은 이 여인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 여인의 마음을 헤아리시며 “울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관속에 있는 아들을 살려주십니다. 목장 없는 양 같이 갈길을 모르는 무리들을 향해 불쌍히 여기셨고(막 6:34), 마리아의 오라비 나사로의 죽음을 보고 불쌍히 여기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요11:33-35). 요 3:17의 기록이 <독생자를 보내심이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라 어떻게든 구원하게 하려 함이라> 한 것처럼 주님은 은혜로 충만하셔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어떻게든 생명을 살리고 구하고자 하셨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기 위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신 것입니다. 벧전 3:18에서 베드로는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그러나 주님의 은혜는 죽음으로 끝나는 스토리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람 많으신 <주님의 눈물 어린 희생의 이야기>로 그치고 말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로 인해 대신 죽으신 사건을 대속의 사건이라고 합니다. 이 대속의 은혜는 나의 죄된 인격을 끌어안으셨다는 뜻이요, 죽음의 판정을 받아야 할 인격을 품고 죽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다시 살아나셔서 내가 그 품에서 함께 살아나게 됩니다. 주님이 하늘로 올라가셨으므로 우리의 처소가 덩달아 하늘에 있다는 것이요, 주님이 하늘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므로 우리 또한 하늘의 처소에서 앉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주님이 차지하신 왕국을 더불어 차지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가 충만하시다는 말씀의 효력입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에 사는 동안 저 타락의 풍파가 쓰나미와 같음으로 인해 그 앞에서 떠셨습니까? 이 시간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우주보다 넓도록 어마어마한 은혜의 충만 앞에서 전율하시기 바랍니다. 거짓되고 어려운 현실과 잘못된 이야기들에 미혹되어 마음에 불안과 상함이 있습니까? 나의 모습이 어떠하였든 나를 품으시는 주님께서 오늘 예배 속에서 나를 만나시며 그 은혜로 나의 영혼을 씻어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의 죄가 어떠했든, 그 은혜가 날 끌어안으셨고, 언제나 그 은혜가 나를 이겨 압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주님은 진리로 충만하십니다. 주님은 진리에 대해 말씀하시고 가르치셨을 뿐 아니라, 그 분 자체로 진리가 충만하셨습니다. 그 증거는 약속을 성취하심을 통해 나타납니다.
고후 1:20는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고 말씀합니다. 창 3:15에 <여자의 후손의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다> 했던 말씀은 주님께서 사탄을 이기심으로 성취하셨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처럼, 주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진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습니다”(사53:4). 진실로 주님은 포로된 자를 자유하게 하셨고(사 61:1), 신명기 18:15에서 모세가 예언했던 말씀 즉,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하신 언약을 성취하셨습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한 유월절에 죽음 당한 어린 양의 실체였으며, 이스라엘을 위해 매일 아침과 저녁 상번제로 드려진 어린 양의 실체였습니다. 진실로 주님은 참된 번제요 화목제요 속죄제였습니다. 진실로 주님은 구약성경에서 그림자와 같이 예표된 모든 것을 성취하신 진리의 실체이신 것입니다.
율법의 완성이라는 말씀 속에 진리는 더욱 빛이 납니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모세 앞에자신을 소개하실 때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하셨습니다(출 34:6). 하나님의 성품은 죄를 용서하실 수 있지만 벌을 모른다 하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마 5:17에서 주님이 말씀합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전능자이시므로 굳이 아들을 보내지 않으시고도 얼마든지 구원의 역사를 이룰 수 있지 않으셨겠느냐고요. 만일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셨더라도 굳이 죽음의 길을 가게 하지 않으시고도 공짜로 구원을 주셔도 되지 않았겠느냐고요. 만일 그랬다면, 하나님은 율법을 어기게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삼상 15:29).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만드신 의의 율법을 어기신다면 하나님 스스로 불의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율법의 완성이 되셨다는 것은 진리이신 하나님의 성품, 율법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당신이 죽으심으로 갚으시면서 아버지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신 것입니다. 고로 진리는 은혜와 함께 충만합니다. 생명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은혜와 하나님의 의가 함께 성취된 역사로서 말입니다. 이 진리, 신비로운 복음의 진리를 기억하십시다. 그 안에 자유가 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여전히 우리는 우리로만 있을 때는 죄의 판정을 받고 사탄의 고발에 해당되지만, 주님께서 나를 끌어안고 죽으시면서 이루어 주신 하나님의 의의 성취! 그 진리로 충만하신 주님, 그 진리를 주시며 우리로 그 진리 안에서 자유케 하시는 것입니다. 이 진리의 충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셋째, 은혜와 진리는 오늘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주님과 사람들의 가르침에 분명한 차이가 하나 있다면, 사람에게서는 은혜에 대해서 들을 수 있고 진리에 대해서 들을 수 있을 뿐이지만, 주님은 은혜와 진리 자체이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은혜와 진리를 마치 배관처럼 전해주는 통로가 되지만 우리 주님은 은혜와 진리의 근원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거두어가시는 분이 아니라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은혜와 진리를 맛보기로 보여주고 가방에 넣고 돌아가는 장삿꾼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은혜와 진리를 주시는 목자인 것입니다. 이 은혜와 진리는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하고 잠시 위안을 주면서 영혼을 속이는 세상 것들과는 다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함께 하심은 오늘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주님께서 그 분의 은혜와 진리를 누리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 은혜와 진리를 나누어주시는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그 엄청난 은혜와 진리로 인해 영원한 생명을 얻은 특혜를 받아놓고서도 “아니 그게 정말이야?” “설마 나를?” “내 주제를 내가 아는데?” 하며 어리벙벙해 있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외아들이셨던 주님께서 우리를 형제로 삼아주셨다는 말씀입니다. 품어서 죽으심으로 살려놓으신 이들을 형제로 부르시며 은혜와 진리를 누리며, 증거하면서-겸손히 자랑하면서, 살아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나의 모습이 어떠하든 나를 감싸고 내 영혼을 붙들어 인도하시면서 말입니다. 끊임없이 말입니다. 영원히 말입니다.
오늘 이 은혜와 진리가 내 앞에 있음으로 오늘도 우리의 생은 얼마든지 살아 봄직 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 은혜와 진리가 있음으로 해서 오늘도 우리의 찬양은 멈출 수 없고, 우리 벧엘 제단은 더욱 행복과 사랑으로 더해가는 교회가 아니겠습니까? 또 여러분이 세상 속에서 어떤 어려움들이 있을지라도 주님의 은혜와 진리가 나의 영혼을 지키시므로, 그 어려움들도 능히 이기게 하시며 선하신 일을 이루시지 않겠습니까? 무한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은혜, 도무지 거짓 없으신 주님의 진리가 우리들의 것이니 말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게 하시는 이 아침, 주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독생자의 영광으로 오시고, 우리와 함께 하며 대속의 구원과 부활의 역사와 승천과 다시 오심의 은혜 앞에 감사를 드리며, 모든 언약들을 이루시고 은혜의 역사를 이루어내시는 진리로 인해 찬송을 부릅니다. 오늘도 살아계신 은혜와 진리 앞에 우리가 고개를 숙이오니, 주님 우리의 삶에 은혜와 진리로 충만해 주시옵소서. 우리의 과거의 기억들과 오늘의 예배와 미래의 계획에 은혜와 진리로 충만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복음과 인생 김창운 목사 2017.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