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벧엘방송 > 주일설교 
  은혜의 해를 사십니까? (2017.02.26)
설교자     김창운 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누가복음 4장 14-19절
 
 
본문 내용
14.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15.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Content


                      은혜의 해를 사십니까? 눅 4:16-20
여러분, 우리의 신분은 무엇입니까? 나는 어디에 속해 있으며, 어디를 향해 가고 있습니까? 이것은 영적 질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오늘 예배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성경은 성전,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라고 말씀합니다. 거룩한 성전으로 지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회당에 모여 예배하였습니다. 안식일마다 성전에 올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지역마다 회당에 모여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그 예배는 오늘 우리와 좀 다릅니다. 가장 먼저 신명기의 쉐마를 선포합니다. 6장4,5절의 말씀으로 “들으라 이스라엘아,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선포하고 기도 합니다. 그러면 온 회중이 “아멘”하고 응답합니다. 그리고 토라, 즉 모세 오경의 말씀을 낭독합니다. 아멘으로 화답하고, 이어서 예언서의 말씀을 낭독합니다. 말씀 낭독할 땐 모두가 서서 말씀을 받습니다. 말씀을 낭독한 후에는 설교나 권면을 하고, 마지막에는 제사장이 축복하면 아멘으로 응답하고 마치게 됩니다.
회당에는 설교자나 목회자가 없었습니다. 회당을 관리하는 회당장이 있었는데, 회당장이 예배 전에 영적 권위와 실력을 인정받는 사람에게 부탁을 해서 성경 낭독과 설교를 하도록 세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나사렛의 회당에서 말씀을 낭독한 것은 바로 그런 배경이 있습니다. 14절에 보면, 예수님의 소문이 사방에 퍼져나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영적 권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뭇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소문이 나자 주님이 돌아온 고향 나사렛에서도 성경을 낭독하고 말씀을 전하신 것입니다.
회당장이 여러 두루마리 중에 이사야서 두루마리를 예수님께 올려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펼쳐서 정해진 말씀을 읽은 것이 아니라, 말씀을 찾아 읽었다고 했습니다. 다름 아니라 이사야서 61장 1, 2절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기다리며 사모하던 메시야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사61:1,2)
본래 이 말씀은 히브리어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낭독자들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두루마리의 내용을 읽고 나서, 당시 통용 언어인 아람어로 통역을 했습니다. 말씀을 읽고 나서 설교를 하시자 사람들이 주목하여 그 말씀을 귀 기울여 듣습니다. 그때 주님이 결정적으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21절 말씀에 보면, <이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응하였다” 곧 성취되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단적인 선언입니다. 선포하신 것이었습니다. “주의은혜의해”가 열렸다! 이 사실을 선언하여 전파하신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떤 해를 살아가고 있습니까? 주님은 말씀합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심이라고요. 이 말씀의 본래 뜻은 “euvaggelisasqai, 유앙겔리사스따이, Evangelization 복음화 한다”는 뜻입니다. 천지가 복음화 되어서 복음의 옷을 입고, 복음의 공기를 마시고, 복음의 시간 속에서 살아가도록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19절 “은혜의 해”를 여셨다는 말씀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복음을 가난한 자에게 주신다고 했습니다. 가난은무엇입니까?결핍입니다.모자람입니다.누군가의도움이필요한상태입니다.주님의복음은물질적으로가난한자에게임했습니다.입니다.그리하여새로운세상을살아가도록하십니다.가장좋은예가누구일까요?이것은우리가확실히알아야합니다.우리민족이그러합니다.우리는 지난 세기에 두 번이나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2차대전의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인 625동란입니다. 한국전쟁 후 5,60년대에 이 땅은 폐허였습니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현재 우리가 선교하고 돕고 있는 필리핀이나 아프리카, 가나보다 1인당 소득이 낮았습니다. 오늘날 어렵다 힘들다 해도 이제 세계에 손꼽히도록 성장하여 풍성하고 부유해졌습니다. 그 원인을 사회학적으로 이리저리 말하지만, 최소한 성도라면 그 원인을 말씀에서 찾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국민성이 부지런하고 똑똑하고 열심히 일하고… 다 좋지만, 그 모든 것 위에 원인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향해 오신 복음, 그 복음의 역사(복음화), 그것이 이 나라를 여기까지 인도하였습니다. 은혜의 해가 실제적이고 생동감 있고 물리적으로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사람들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복음의 능력을 물질로는 맛보았지만, 그 심령에 이르는 복음화까지 도달하지 않은 것입니다.
어느 여성이 빈민가에서 봉사활동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 곳에서 다리를 심하게 다쳐 쓰지 못하는 한 소년을 보았습니다. 그 아이를 의사에게 데리고 가서 수술을 시켜줍니다. 수술이 매우 성공적으로 되었습니다. 그녀는 의사와 함께 그 소년에게 걷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이 아이도 열심히 훈련을 하더니 마침내 다른 아이들처럼 뛰고 놀고 걷게 되었습니다. 그 여자분은 행복한 마음으로 그가 걷는 것을 보았습니다. 의사도 행복하게 그 소년을 바라보며 돌려보냈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그 때 그 소년의 다리를 고쳐준 의사가 이 여성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소년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눕니다. 당연히 안부를 물었겠죠. 이 여인의 표정이 어둡고 머뭇거리다가 말합니다. “지금 그는 형무소에 가 있습니다. 살인을 저질렀어요. 박사님, 그 때 우리는 그 애에게 걷는 법만 가르치려고 애썼지, 걸어가야 할 방향을 가르치는 것을 잊고 있었어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인생이 얼마나 복된 인생인지 다시 한번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 심령을 가난하게 해주신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심령의 가난함이란 “누군가 내 심령을 도와주지 않으면 못산다”고 느끼는 자입니다. 우리 인생이 어쩌다가 주님을 이렇게 만났고, 무슨 재주로 주님의 은혜를 제대로 깨달아 오늘 아침도 “주님의 은혜 아니면 살 수 없습니다” 고백하며 여기에 나온 것입니까? 영혼의 갈급함을 깨닫고 생수에 목마름을 느끼며 이 예배를 통해 영혼을 채우며 가는 인생, 이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태복음 5:3에서 주님의 산상수훈 초두에 말씀하시던 여덟 개의 복 중에 첫 번째 말씀이 비로소 이해가 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왜 그 사람이 복이 있으며, 왜 그런 사람들에게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하신 이유를 말입니다. <주님 없으면 나는 결핍된 인생, 내 심령은 하염없이 가난하옵니다> 이 고백이 있는 자가 복되다는 것입니다. 왜요? 그 결핍을 깨닫는 자, “가난한 자에게” 주님께서 복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심령을 복음화 시켜 그 결핍을 해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화됨의 효과를 시시하게 보시면 안됩니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눌린 자를 자유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듣기 좋은 싯귀나 명문으로 외워둘만한 성경구절 정도로 여기면, 그것은 주님의 능력과 권위를 무시하시는 것입니다. 수박 겉핥기처럼 겉맛만 보는 것입니다.
주님의 베푸신 기적의 현장에서 빵을 얻어 먹었던 5천명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 이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 모두 가난 했습니다. 주님이 빵을 먹이셨습니다. 그들은 빵을 먹을 뿐 아니라 복음의 전파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몇 명이나 예수님의 복음으로 복음화 되었는지 성경은 우리에게 들려주지 않습니다. 빵의 만족에서 복음이해를 멈추어버린 이유입니다. 그런 이들의 인생과 역사는 이제 퇴보할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말씀을 듣는 나사렛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주님 말씀의 겉만 핥습니다. “우리랑 같이 살던 목수의 자식 아니냐, 요셉의 아들 아니냐. 이런 반응 속에서 이 나사렛 사람들은 스스로 당시의 속담에 젖어있었음에 분명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마치 메시야인 것처럼 말하는데, 나사렛, 우리 마을 출신 주제에 무슨 위대한 인물이냔 말이냐?” 그들은 예수님을 거절합니다. 배척합니다. 쫓아낼 뿐 아니라, 낭떠러지로 떨어뜨려 죽이려 했습니다. 자칫 말씀과 복음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비본질에 묶였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위험입니다.
포로된 자가 누구입니까? 나라를 잃고 타국으로 끌려가서 갖은 고생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노예입니다. 추방자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손을 외면하고 죄와 사탄에게 끌려가 거기에 종노릇하는 인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하였”다(갈 4:8)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자유의 몸이 되게 하셨다”(갈 5:1)고 말입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정죄가 아닙니다. 죄책감도 아닙니다. 간음하다 붙잡혀온 여인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하십니다. 자유입니다. 사도요한이 증거하여 8:36에 말씀합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눈먼 자가 누구입니까? 이사야서에서는 이 눈먼 자가 아니라 갇힌 자라고 했습니다. 같은 의미죠. 어두운 감옥에 갇혔던 자가 석방을 하게 되면, 찬란한 태양 아래 있게 됩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 중에 한 장면에 보면 주인공이 억울하게 붙잡혀 갔는데 감옥에서도 억울한 누명으로 독방에 갇히게 됩니다. 빛 하나 들어가지 않는 독방에서, 시간을 모릅니다. 날짜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릅니다. 얄굿은 식사 끼니가 한번 들어올 때 외에 어떤 빛도 없습니다. 나중에 독방에서 나와 태양 아래에 나와 눈부셔 어쩔 줄을 모르던 장면이 늘 기억에 남습니다.
우리의 어두운 눈을 주님이 밝혀주신다고 했습니다. 눈먼 이들을 주님께서 고쳐주셨습니다. 심령의 눈먼 자들에 영적인 눈을 밝혀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사모하고 예배를 사모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에서 임하시는 주님을 만남으로써 영의 눈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땅너머를향해눈이올라가는것입니다.“내가산을향하여눈을들리라”하던시인의고백처럼,높은곳을향해눈이들리는것입니다.하늘이보이고천국이보이고,천국을사모하는인생으로살아가게되는것입니다.복음의역사인것입니다.예배자의특권인것입니다.자유와해방의증거인것입니다.오늘우리가복음을누리며시편기자의찬미처럼,“내 주의법에서, 놀라운 진리를 보게 하소서”(119:18) 이 찬미가 더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눌린 자들이 있습니다. 오늘도 이 세상에는 눌린 자들이 많습니다. 육체적, 정신적, 감정적, 심리적으로 눌린 자들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눌린 자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눌림의 자들에게 해방을 주시는 것입니다. 몸의 상함으로 눌린 자가 있습니다. 사고를 당해 몸이 상한자가 있습니다. 심신이 괴로움으로 눌린 자가 있습니다. 슬픔으로 인해 감정이 억눌린 자가 있습니다. 죄로 인해 눌린 자가 있습니다. 질병으로 인해 눌린 자가 있습니다. 사업의 실패로 눌린 자가 있습니다. 어딘가를 지원했다가 거절당하거나 실패를 경험했다고 해서 그것이 충격이 되어 눌린 자가 있습니다. 은퇴 후에 무력감에 눌린 자가 있습니다. 악성 습관으로 인해서 눌린 자가 있습니다. 절망적이고 비관적인 말 습관에 눌린 자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들의 문화 속에서 마음 속을 가로 막은 한으로 인해 눌린 자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모든 눌림 또한 주님께서 씻어버리시고 자유를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성령의 역사로 그 눌림으로부터 해방되시기 바랍니다.
때때로 우리가 이 은혜의 해를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자유가 무작정 주어진 줄로 알기 때문입니다. 나사렛 회당에서 그냥 말로 선포된 것으로만 알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18장 이하에서 말합니다.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대제사장에게 끌고가 고발합니다. 심문하고 고문하고, 억울하다고도 말해볼 시간도 없이 끌고가 비참하게 죽여버렸다고 말입니다. 십자가에서 말입니다.
이사야서 53:5은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무려 하나님이나 되신 분이 이 땅에 오셔서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에게는 자유를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십니까? 이 사실을 깨달음으로서만 우리는 모든 눌림에서 자유 되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 분은 죽으시면서, 우리를 향해 “이제 너는 자유인이다.” 선포하신 것입니다.
피고가 무죄 선언을 받았으면 자유인입니다. 포로가 해방되었으면 그 또한 자유인입니다. 재판장이든 노예를 해방시킨 정치인이든 자유를 준 이 사람을 양자로 삼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인이었다가 자유인이 되었을 뿐더러,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영광까지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잘 실감이 안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가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작은 머리로 이해하기에는 그 은혜가 크기와 넓이와 높이와 깊이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으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여러분을 향한 사랑입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 주님이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찢어버리신 저 성소의 휘장을 떠올리시기 바랍니다. 장막을 거두어버리시기 바랍니다. 그 위대하신 사랑에 대해 영의 눈을 활짝 뜬 채 살아가기로 하십시다. 영혼의 창문을 활짝 열어 천국을 바라보며 사십시다. 우리는 죄와 죽음이 가로막지 못합니다. 우리는 어두웠던 감옥에서 해방되어 나온 새 인생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눌림에서부터 자유케 된 것입니다. 아픈 것도 힘든 것에서도 자유케 되어 해방의 기쁨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가장 고상한 지식인 것입니다. 그간 세상에 속하여 의지했던 초등 학문의 자리를 떠나 영원한 세계를 향한 은혜의 해를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은혜의 해를 누리는 자로서 우리 삶의 기준이 성경 말씀입니다. 우리의 호흡이 찬양입니다. 우리의 말이 기도요, 우리 삶을 지탱할 수 있는 기력은 성령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결단을 도와드리기 위해서 손익을 따져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은혜의 해가 열렸습니다. 그것을 누리지 않으면 누가 손해입니까? 누릴 줄 모르는 사람만 손해입니다. 주신 은혜, 열린 은혜의 해! 이것을 부지런히 사시는 여러분, 힘내어 불들고, 의식하고 의지하며 승리의 찬송을 부르며 살아가시는 인생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무엇인데, 은혜의 해를 여시고, 그 해를 보여주시고 살아가게 하시는지, 은혜를 다 알 수 없어 믿기도 어렵습니다. 하나님 그 사랑의 위대함을 다 알지는 못하나 우리의 심령이 그 사랑을 믿게 하시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하여주옵소서. 우리 인생이 은혜의 해를 풍성히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으로 붙드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성전됨의 특권 김창운 목사 2017.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