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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에 담긴 비밀 (2017.02.12)
설교자     김창운 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요한복음 4장 20-30절
 
 
본문 내용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27.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Content


                     예배에 담긴 비밀 요 4:20-30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떠오르는 질문이 있습니다. ‘왜 사는가’부터 시작해서, ‘무슨 뜻인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등등 이런 질문들이 철학을 만들고 과학을 만들고 우리의 인격을 만듭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신앙의 틀을 세우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만나는 사마리아 여인도 예수님 앞에 질문들을 합니다. 여인의 물음은 “어찌하여” 에서 시작합니다. “어찌하여 당신은 유대인인데 내게 물을 달라 합니까?” 다음은 “누구”의 질문입니다. “당신은 야곱보다 더 큽니까?” 그리고 “어디서”라는 질문입니다. “예배는 사마리아에서입니까, 예루살렘에서만 입니까?” 중요한 건 이 여인의 질문이 점점 고차원적으로 올라가는데 있습니다. 육신의 질문에서부터 영적 차원으로 향해가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서 주님은 “때”를 말씀합니다. “바로 지금 이때라!” 주님을 대면한 이 때가 예배할 때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가 말씀하십니다. “영과 진리로! en pnewmatoi kai alaetheia (in spirit and truth)”라고 말입니다.
예배의 정신이 이 말씀 속에 있기에 모든 예배의 시작에는 이 구절을 읽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오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우선 영으로 예배한다는 것을 해석하면서, 사람을 영, 혼, 육, 삼분법으로 나눕니다. 육이 있고, 혼 즉 마음이 있고, 영이 있는데, 그 중에 영으로 예배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마치 신접한 사람처럼 마음과 육신과는 상관없이 영만으로, 정신줄도 몸도 다 놓고 마치 혼절한 사람처럼 예배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인간관에서 나온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사람은 영과 육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이란 우리의 마음, 인격과 떼어놓을 수 없는 자아의 실체입니다.
과거 개역한글 성경에는 영과 진리의 예배를 ‘신령과 진정’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그 음감이 “거룩하게 정성을 다한다” 이렇게 들렸습니다. 그래서 예배할 때는 몸가짐을 정돈하고 옷을 잘 차려 입고 나와서, 딴생각하거나 졸거나 하지 말고 예배에 집중해야 한다고 이해를 하였습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은 그럼에도 훌륭하고 멋진 분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정성 들여 예배하며 교회와 우리들을 길러내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예배의 의미를 보다 깊이 깨달으며 예배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특권적 은총을 깨달아 누리며 우리 자녀들에게 전수해야 할 때입니다. 이 예배에 담긴 은총의 비밀 세가지를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영으로하나님을만나는비밀입니다. 오늘 주님이 말씀하신 “예배”라는 말은 헬라어 원문으로 ‘프로스퀴네오’라고 합니다. 이 말은 두 단어가 합쳐진 겁니다. ‘프로스’라는 단어와 ‘퀴네오’라고 하는 단어가 합쳐진 건데, ‘프로스’는 전치사입니다. ‘~을 향하여’ ‘~에 접근하여’ 라는 뜻입니다. ‘퀴네오’라는 단어는 흥미롭습니다. ‘입맞춘다, 키스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프로스퀴네오, 예배한다’는 말은 “예배를 드리는 대상에게 가까이 나아가서, 그 예배를 드리는 분에게 입 맞추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배는 분명, 사랑의 관계를 뜻하는 말임에 틀림 없습니다. 세상에 숨길 수 없는 게 두 개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재채기, 하나는 사랑에 빠진 것이라고 합니다. 영으로 예배하는 의미가 거기에 있습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를 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영이 사람과 함께 있지 않기로 했다”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고 했습니다(6:3). 이 말은 영과 육으로 이루어진 인간이 육체에 해당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육체라는 말, 히브리어로 <바사르>라는 말은 죄로 인해서 죽음으로 가게 되는 타락한 육체를 말합니다. 로마서에서도 나오는 듯이 인간이 타락한 육체에 속하게 되고 만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을 깨우치는 말씀입니다.
우리 마음이, 인격이 육체를 통해 접하는 것들에 의해 장악될 때 육체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격은 육체를 통해 만나는 사건에 대해 생각하고 반응합니다. 육체를 통해 만나게 되는 물질, 사건에 대응해서 인격이 반응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우리가 육체를 통해 만나게 되는 육체의 일에만 관심이 집중되고, 거기에 몰두하게 될 때 “육체가 되어버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일에 매혹되어 육체의 일에 입맞추고 거기에 장악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영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저 육에 장악되고 매혹되었던 나의 인격, 나의 영이 하나님을 향하여 옮겨오는 것입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영희씨 생각에 온통 마음이 거기에 가 있습니다. 드디어 데이트 시간이 다가올 때 안달이 나서, “이렇게 꾸미면 멋있다고 할까, 오늘 꽃을 선물하면 행복해 할까” 오로지 그렇게 온 맘과 관심이 그에게 집중되는 것, 여러분도 다 해보셨을 것입니다.
바로 그 인격, 그 영이 하나님께로 향해진 것을 말합니다. 특히 헬라어에 “영”이란 말 앞에는 관사가 없습니다. 곧 영이란 성령으로 거듭난 새로운 성품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으로 예배할 수 있는 것은 성령에 의해 새롭게 된 생명이기에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세상에 것은 씻어지고 새롭게 된 영이 하나님의 영을 마주하는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보고 싶고 그리운 마음으로 사무쳐, 욕심도 사상도 이데올로기도, 세상과 육의 것은 다 벗은, 천국에 그 영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 속에는 오로지 하나님의 영이 나의 영을 만나주시는 전격적 만남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의 입맞춤과도 같이 은밀하고도 황홀한 비밀이 우리의 예배 속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살아계신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심령을 만지시고, 곤고한 영혼들을 향해 비밀처럼 주시는 거룩한 입맞춤의 여러분의 것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진리안에서누리는자유의비밀입니다.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성품인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화재가 나서 연기가 자욱한 건물에서 뛰쳐나와 깨끗한 산소와 아름다운 향기 가득한 공간에서 마음껏 숨쉬는 것과 같은 은총입니다. 그것은 자유라는 이름의 은총입니다.
진리가 아닌 예배가 있을까요? 예. 윌리엄 바클레이는 세가지를 지적합니다. 첫째, 편협된 예배입니다. 성경 말씀을 자신들의 편리대로 추려서 설교하고 나머지 부분들은 무시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인종차별이나 민족차별, 성차별을 정당화하면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과거 남아공이나 나찌 독일, 인종을 차별하는 미국, 영국, 자민족 외에는 열등하다고 차별하던 일본이 식민 체제를 정당화하던 때의 예배입니다. 둘째는, 감정의 차원에 머무르는 예배라고 합니다. 예배를 찾는 경우는 처음에는 마음에 위로를 얻기 위해 시작하지만 예배를 드릴수록 믿음이 깊어지고, 심령의 깨달음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믿음의 고백이 깊어져서, 왜 내가 예배하는 것인지, 왜 내가 교회를 나가는 것인지 고백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는데, 잘못된 예배는 감성의 위로와 자극만을 부추기면서 성장과 변화를 이루지 못하는 예배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맹목적인 두려움으로 참여하는 예배라고 합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그것을 계산하시는 하나님이 벌을 내리실까봐 두려워서 예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에게 진리의 예배를 드리도록 “하나님은 누구신가”를 풀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라”고요.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물질에 제한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예루살렘이나 사마리아”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죄를 조목조목 헤아려서 벌 주는 것을 즐기는 재판관>이 아닙니다.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친근한 아버지이십니다. 이것이 예배 속에 가득한 진리입니다. <사랑의 진리> 말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의 진리 가득한 천국의 공간 속에서 그 사랑에 감사하며 거룩한 입맞춤을 올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은 그 진리 안에서 춤추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이요, 무엇도 훼방할 수 없는 자유인 것입니다.
마르틴 부버라는 유명한 유태인 철학자는 <I-Thou>라는 책을 씁니다. 여기에 골자는 사람이란 존재는 “나임”과 동시에 “당신, 너”와의 만남을 통하여서라야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는 것입니다. 내가 있음과 같이, <너, 당신>이라는 인격적 존재가 더불어 있음으로서야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힘들고 외롭고 불행한 이유는, 나와 너와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It(그것)>의 관계 속에 살아가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사실 우리가 운전을 하다 보면, 나 외의 다른 차들은 다 적군의 차들입니다. 저 안에 누가 들었건 조금만 위협이 되거나 방해가 되어도, 이놈이 되고 저놈이 됩니다. 사람이 아니라, It이 된단 말이죠. 우리의 삶의 고객이든, 상사든 동료든, 심지어 친구나 부부도 it이 되는 순간 서로 불행한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야말로 “나”도 없고, “너”도 없습니다. 인생 망가져서 누구도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데, “내”가 어디 있습니까? 지금 동거하는 여섯번째 남자도, 동네의 여인들도, 유대인들도, 모두가 그것, 그것들이었어요. 그런데, 주님을 만난 순간 이 여인이 발견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 나”를요.
25절에, 이 여인 말합니다.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그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메시야,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나와 대화하십니다. 주님이 저 멀리의 IT이 아니라, 바로 나의 ‘Thou 당신”이 되신 것입니다. 주님이 <나의 당신되심>을 발견하자, 동시에 그 안에서 “나” 또한 발견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8절에는 성경 읽기를 좋아하는 분들이 그토록 감동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물동이를 버려 두고”라는 구절입니다. 이 여인이 누구였다고요? 문자 그대로 물을 길러 나온 여인입니다. 우물물, 이것이 바라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자 '물동이'도 잊어버립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그 사랑을 만나고, 그 안에 있는 나를 발견하자 모든 세상의 것으로부터 자유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 안에서, 그 사랑의 진리 안에 있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자유가 솟구쳐 튀어 나오는거예요. 예배의 비밀이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예배 중에 계신 여러분, 세상에서 살아가며 얼마나 많은 것이 여러분의 어깨를 짓누릅니까? 오랜 세월 질병에 두려움에 수많은 근심에 눌렸던 자들이 오늘 “하나님, 그분이 <나의 인격적 당신>이 되어 영원히 날 사랑하신다”는 진리를 만나지시기 바랍니다. 바로 오늘 이때, 우리들의 예배 속에 임재하신 성령님의 역사를 만나면서 여러분의 영이 “여러분을 영원토록” 사랑하시는 그 사랑의 진리로 인해 세상의 것을 내려 놓게 되는 자유의 은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세 번째, 예배를통한새인생으로변화라는비밀입니다. 자유를 누린 자의 첫 번 행위는 물동이를 놓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한 일입니다. 물동이를 놔두고 동네로 뛰어 들어가서, 동네사람들에게 뭐라 뭐라 떠듭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에게 있었던 일을 알아맞힌 그 사람을 와서 보라! 이 사람이 메시아가 아니겠느냐, 선지자가 아니냐?’ 합니다. 전도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기쁨이라는 단어가 한마디도 없지만, 우리는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기뻤을까? 그토록 기뻤기에 물동이도 놔두고, 동네에 나가서 전도를 하는데, 그 동네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자기의 과거부터 지금까지 수치스러운 모습을 다 알기 때문에, 경멸하고 비웃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피하던 사람, It 이었죠. 그런데 그들을 찾아가서, 자신의 수치스러운 삶을 드러내면서 ‘나의 수치스러운 과거를 다 알고 있는 선지자를 와서 보라’고 전도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듣고 이 사람들이 예수께로 옵니다. 이들도 함께 믿고, 함께 살아가는 당신이 되는 순간인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과격한 변화가 있었을까요? 예수님을 단 한번 만났는데…. 예수님을 만났으니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알게 모르게 어떤 에네르기 파를 넣어주셔서 그렇게 된 것일까요?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과거를 다 알고 계신 것을 보고 이 여인이 이 분이 보통 분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진 후에 첫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의 이야기였습니다. 이 질문은 주님이 꺼내신 얘기가 아닙니다. 예배라는 말을 이 여인이 꺼내었다는 겁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왜 하필 사마리아 여인이었을까를 생각합니다. 말 잘 듣는 제자들도 있고, 잘 배운 니고데모도 있을텐데, 왜 이 여인일까요? 결코 이 세상에서 내 공허한 마음을 채워줄 사람은 없다. 내 이 버려진 풍선 같은 인생의 문제를 책임질 사람도 없다. 이 심령의 문제, 내 인생의 문제, 내 육신의 문제 조차도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 한 분 뿐이다. 그 인생의 마지막 보루로 찾고 또 찾는 하나님에 대한 갈급함이 이 여인에게 있습니다. 고로 그녀의 사연많은 인생도 결국은 은혜로 화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들의 삶은 어디에서 그 가치를 발견하십니까? 오늘 우리가 수많은 문제들과 어려움을 안고 있다면, 그것은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뿐임을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인 것입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 자유를 누리게 되며 새 생명, 새 인생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육체의 문제가 문제가 되지 않고, “내 안에 사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시요, 나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영광, 예수님의 이름! 그것이 내 인생의 방향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세상의 문제들도 해결되고 더 놀라운 복이 하늘로부터 임하고 땅에서 솟아오르는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기도의 어머니들이 그렇게 해서 교회를 살렸고, 많은 영혼들을 교회로 인도하면서 살 때, 은혜가 그 집안에 머물며 집안도 키워져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은 티비에서 예배 방송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인터넷 교회 홈페이지에서, 유투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밥 먹으면서, 커피마시면서, 소파에 누워서 설교, 예배 실황을 볼 수 있는 시대입니다. 편리합니다. 그러나 이 편리한 예배 실황은 예배가 아닙니다. 육체적 구경입니다. 그런 구경은 영과 진리가 살아있고 자유와 변화를 주는 적이 없습니다. 조심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육체적 구경은 귀를 호사하는 것 외에 영적 유익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으로 자기만족을 주어 교회와 예배 생활을 우습게 여기게 만듭니다. 여러분께 권면하기는, 가급적 그러한 편리한 육체적 예배 시청은 삼가 하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예배 참석이 불가능하신 분들은 이해가 되고도 남습니다. 교회에 못나오는 분들을 위한 배려 정도로 생각하며 좋습니다. 다만 오늘 이 설교 영상을 보시는 분들도 가급적 편리한 자세나 다과하는 분위기보다는 영과 진리 안에서 자유를 꿈꾸고, 새 생명을 누리고자 하는 갈급함으로 참여하시기를 권면합니다..
이 말씀은 기독교 방송을 방해하려 하거나, 인터넷 방송을 무시하는 것이 아닐 것을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과 육신, 삶의 참된 행복을 위해 전하는 말씀인 것을 믿을 것입니다.
참된 예배는 갈급하고 간절한 영이 하나님과 입맞춤하는 중에,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ㅇ에 깨닫는 사랑의 진리 안에서 참된 기쁨, 그리고 그 예배를 통한 새로운 삶의 비밀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예배가 우리 벧엘 교우들의 예배가 되어, 참된 행복을 놓지지 않는 복된 인생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오늘 저희를 부르시고 예배에 담아주신 소중한 비밀들을 듣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선 구하옵기는, 우리의 예배를 축복하셔서, 저희들의 예배 속에 충만히 살아 역사하여 주옵소서. 성령님의 역사 속에 하나님에 온전한 영과 진리를 예배를 드리게 하심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진리 안에서 춤주며, 새 생명의 삶이 나타나는 은총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예배자의 특권 김창운 목사 2017.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