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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짜기가 메워지고 산들이 낮아지며...
곽신환 2015-12-03 12:28:33 44

전학매산(塡壑埋山)의 대설(大雪) 

 

아침부터 눈이 제법 많이 내리고 있다. 소설(小雪)에 이어 오는 절기 대설(大雪)은 눈이 많이 내린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인데 통상 12월 7, 8일에 닿는 이 절기를 며칠 앞두고 내리니 절기에 대한 신뢰를 다시 쌓게 된다. 이 무렵은 한 겨울이요, 눈도 많고 추위도 심하니 옛 사람들에게는 자연 농사일도 없어 한가로왔다. 그저 가을에 거두어들인 오곡(五穀) 백과(百果)를 곳간에 가득 쌓아 놓고 여유 있게 즐기는 때이므로 연중 가장 심신이 풍요롭고 행복한 시기이다.  

 

누구든지 오늘처럼 밤 사이에 쌓인 대설로 인한 장관(壯觀)의 경험을 갖고 있을 것이다. 시인들이 이것을 놓칠 리 없다. 월사 이정구, 상촌 신흠, 계곡 장유, 택당 이식 이 네 사람을 월상계택(月象谿澤)이라 부른다. 16 17세기 조선의 문장 4대가이다. 이들중 상촌(象村)과 계곡(谿谷)의 대설(大雪) 시를 한번 보자.  

  

상촌 신흠(1566-1628)은 큰 눈이 내리자 음양의 조화(造化)가 무궁함을 느끼고 무어라 묘사할 수 없음을 토로했다.

골짜기 메꾸고 산도 묻혀 눈에 보이는 곳 어디나 다 같고/ 塡壑埋山極目同

온통 구슬의 세계요, 수정의 집이네/ 瓊瑤世界水晶宮

세상에 그림 그리는 사람 수없이 많음을 알지마는/ 人間畵史知無數

음양이 일으키는 변화는 그려내기 어렵지/ 難寫陰陽變化功 

 

신흠의 첫 구절 “골자기 메꾸고 산도 묻힌다”는 구절은 구약성서 이사야서(40:4)에서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이 낮아질 것이며 거친 땅이 평탄해지고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다”라는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이사야서 내용이 사회 정의를 염두에 둔 묘사라면 신흠의 시는 그것을 폭설이 현실 속에 구현해 주고 있음을 보여준다. ‘눈에 보이는 곳 어디나 다 같다(극목동;極目同)’는 자연의 세계에서의 평등(平等) 동일(同一)을 말한 것일 뿐 이를 인간사회의 정의(正義)로 연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눈 구경도 못하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떨치지 못한다.  

    

계곡 장유(1587-1638)는 칠언율시의 형식으로 큰 눈이 내린 전원을 아래와 같이 묘사했다.  

    

삭풍이 눈을 몰아 하늘 가득 채우니/ 朔風驅雪滿天來

하루 밤에 초가집이 짓눌려 부서질듯/ 一夜茅簷壓欲摧

고목나무에 찬바람 소리 쌩쌩거리고/ 枯樹乍聞寒響急

창가엔 재촉하는 새벽 빛 가득하네/ 小窓全覺曙光催

촌아이는 새길 이용 늦으감치 물 길러 가고/ 村童晚汲通新徑

아낙네는 아침밥 짓느라 재를 걷어 내네/ 竈婦晨炊撥舊灰

모든 밭고랑의 푸른 싹 묻혀 얼지 않을테니/ 遍壠靑苗埋不凍

보리 걷이 때 풍년을 기다릴 만하지/ 豐年賸待麥秋迴 

 

갑자기 세상이 확 달라져 있는, 그로 인한 신선한 충격이 잘 그려진 시이다. 절기 대설에 눈이 많이 오면 다음 해에 풍년이 들고 따뜻한 겨울을 날 수 있다고 믿었다. “눈은 보리의 이불이라”하듯 많은 눈이 쌓여 전답을 덮으면 밭작물, 특히 가을에 파종한 보리가 냉해(冷害)를 피할 수 있어 이듬 해 보리 풍년이 든다는 생각을 했다. 매운 바람,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초가집, 새 길을 내는 듯 아침 물 길러 가는 아이를 기다리며 식구들 밥 짓는 불 지피는 아낙네의 모습과 함께 불편한 폭설이지만 내년 봄 풍년을 기약하며 마음 달래는 실용적 이해가 안쓰럽기도 하다.  

 

출근길 교통 대란의 걱정이 앞서기도 했지만 이해관계 없는 아이들은 마냥 좋기만 하다.(20151203곽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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