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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영혼의 편지 137호)
관리자 2018-02-13 12:04:5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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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2018년 2월 13일 (137호)



사람이 살다 보면 여러 가지 형태의 원치 않는 고난을 당할 때가 있다. 그 경우 크리스천들 역시 근심과 불안 속에 쉽게 침몰해 버리고 만다. 자기 고난의 틀을 하나님보다 더 크게 인식하고 있음이다. 자기 고난의 틀이 클수록 그 속에서 하나님을 찾기란 더욱 어렵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교회의 기도회에 참석하거나 혹은 산속 기도원을 찾아 기도할 때면 문제가 곧 해결될 것 같은 마음이 들다가도, 그 자리를 떠남과 동시에 다시 근심의 파도에 휩쓸려 버린다. 용케 고난에서 벗아났다 하더라도, 그 다음 또 다른 고난을 당하게 될 경우 똑같은 과정이 되풀이된다. 그 결과 일평생 여러 번의 고난을 당하고서도 고난과 고난 사이에는 아무 접점이 없게 되고, 고난을 성숙의 발판으로 삼지도 못한 채 신앙은 늘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제자리를 맴돌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큰 틀 속에 품겨 있는 나의 작은 틀을 보라. 하나님께서 지금 내가 고난당하고 있음을 아시는가, 모르시는가? 당연히 알고 계신다. 내게 지금과 같은 고난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고난의 대명사로 불리는 욥의 고백에 귀를 기울여 보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23:10)

 

욥이 지금 가고 있는 길이 대체 어떤 길인가? 하루아침에 재산을 다 날렸다. 자식이 한순간에 몰살당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욥의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에 이르기까지 온몸에 악창이 나 전신을 기와 조각으로 긁어야만 했다. 심지어는 아내마저 나가 죽으라며 저주를 퍼부었다. 동방의 거부였던 욥의 과거를 생각하면, 지금 욥은 고난의 거적을 뒤집어쓰고 있는 실정이다. 고난을 당하는 자의 가장 큰 괴로움은 이 세상 그 누구도, 하나님마저도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아픔을 알지 못할 것이라는 절망감이다. 그러나 욥은 달랐다. 자신이 걷고 있는 고난의 길을 이 세상 그 누구도 알지 못해도, 오직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심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욥의 사정을 다 아시면서도 왜 그의 고난을 당장 제거해 주시지 않았는가? 아니, 애당초 왜 그 고난을 허락하셨는가? 욥의 고백은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23:10)

욥은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신 까닭이 자신을 골리거나 해치시기 위함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자신을 정금처럼 단련시키기 위함임을 분명히 믿었다. 그는 믿음의 큰 틀 속에 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큰 틀 속에 품긴 자신의 틀을 볼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면 그 형태와 내용이 무엇이든 자신의 유익을 위함임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결국 그는 바른 믿음의 큰 틀 속에서 고난을 발판으로 삼아 위대한 신앙의 표상이 되었다.


                                                                                                                                         이재철,   ‘내게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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